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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4. 11. 11:30

 

 집 앞 보도에 놓인 화단이 한창 교체중이다. 회색 점퍼를 입은 중년의 작업자 서너분이 둥그런 시멘트 화단 안에 고여있던 흙을 파내고,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 붉은 꽃을 심고 있다. 날씨가 부드러워 그런지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덩달아 부드러워보인다. 꽃나무를 조심조심 옮겨 심을 때 작업자의 얼굴에는 아주 옅은 기쁨이 서려있다. 작고 붉고 여린 식물을 다루며 중년의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다. 모처럼 길가가 환하다. 새로 피어나고 돋아나는 것들은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을 누그러지게 만든다. 

 아기의 얼굴은 그 자체가 봄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피부, 눈동자, 머리카락, 손톱과 발톱 모두가 아주 연하고 또 푸르다. 며칠 전엔 아기의 얼굴에 꽤 큰 상처가 생겼다. 아직 손발의 움직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는터라, 자기 손톱으로 얼굴을 자주 할퀴는 탓이다. 긁힌 자리는 깊게 패여 피까지 고여있었다. 기겁을 한 나는 연고를 발라주고 아침저녁으로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이틀만에 아물었다. 어디를 긁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만큼 감쪽같다. 다시 희고 보드라워진 아기의 피부를 한참 들여다봤다. 새 피부는 방금 옮겨 심은 작은 꽃나무처럼 붉고 희다. 아기의 얼굴을 보고있으면 나는 원시인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수만년 전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들도 나와 비슷한 자세로 아기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컴컴한 동굴에서, 구석기에도 신석기에도 전쟁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낳은 작은 사람의 얼굴과 검고 작은 눈동자를 끊임없이 쳐다보고 또 쳐다보면서 그 안에서 봄을 느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희고 또 어여쁜지 감탄하면서 또 자신에게선 사라진 봄기운을 맡으며 놀라워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아기의 눈을 보다 거울을 본다. 내 눈에서는 사라진 빛이 아기의 눈에서 보인다. 이 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새끼를 낳아 기르고, 세상이 이렇게 돌고 돌아 내게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아기의 작은 눈동자 속에 삼라만상의 이치가 녹아있는 것만 같다.

 아기의 눈동자에는 아주 먼 과거와 아주 먼 미래가 동시에 잠들어 있다. 아기의 눈동자를 보며 원시인류를 떠올리다가도, 이내 몇십년 후를 상상하게 된다. 이 눈동자에 감도는 윤기와 총기도 언젠간 시들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아기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아기 역시 나와 비슷한 자세로 자신이 낳은 것의 얼굴을, 눈동자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감탄하게 될까. 만일 내가 그 때도 존재한다면 꽤 늙은 채로 아기를 쳐다보며 어리둥절 놀랄 것이다. 우리 엄마가 어제 말한 것처럼,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너를 키우던 때로 돌아온건가'중얼거리며.

 미래의 나는 그 때 새로 만난 아기의 눈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봄이 오면 좀처럼 집 안에선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언제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온건가, 시간의 흐름에 놀라고 의아해하면서. 봄을 보는 기쁨에 새로 젖은 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