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177)
A (177)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19. 4. 25. 18:20

 

 대학로의 오래된 병원에는 병원답지 않은 정취가 깃들어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300년된 은행나무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주치의가 들어왔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주치의는 그 사이 부교수가 되어 있었다. 병원에 남아 있는 나의 첫 진료기록은 2006년. 턱관절이 벌어지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주치의는 당시 레지던트였다. 나는 스무살이었고 주치의 역시 20대 후반이었다. 남쪽지방 사투리와 섞인 억양 덕분에 고향이 어디라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던 것도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13년 전 수더분하고 어리던 주치의는 이제 진료실 앞 스크린의 사진 속에서 팔짱을 낀 채 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사투리가 남아있는 특유의 억양이 있어, 이 교수가 그 시절의 레지던트였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나게 할 뿐이었다. 

 "그럼 어금니를 빼면 안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치과 의자에 길게 기대 앉아있으니 옆 자리 남자의 고통이 들려왔다. 곤란한 상황인 것 같았다. "아뇨 이 어금니 주위가 붓고 아프시니 빼는 게 맞긴한데... 어금니를 빼는동안 턱이 많이 힘드실거예요". 어금니와 턱관절에 동시에 문제가 있는 남자였다. 이를 빼면 관절에 무리가 가고, 관절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빼지 않으면 주변 이까지 상하게 된다. 남자와 주치의는 한참동안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시죠". 진퇴양난에 빠진 남자가 아이구...하고 한숨을 쉬는데 마침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이면 가사에 이를 악물고 너를 잊을게...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는 휘성의 발라드였다. 이를 악물고 너를 보낼게 사랑 앞에 나는 죄인이야... 절절한 가사를 듣다보니 새삼 경각심이 들었다. 그렇다 이는 절대로 악물어선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이를 무는 습관 때문에 턱관절이 아프고, 여기까지 와 누워있으니까 말이다. 저도 아기를 낳으면서 이를 너무 악물어서 10년만에 여기 다시 왔거든요. 저희 이제 절대로 이 악물지 말아요. 얼굴을 덮은 온찜질팩을 들추고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넬 뻔 했다. 휘성의 노래가 다 끝나갈 때까지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엔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거리를 천천히 가로지르다 종로3가 버거킹 앞에서 정차했다. 활짝 열린 버거킹 2층의 창문 너머로 중절모를 쓴 두 노인이 보였다. 커피를 앞에 두고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로3가 버거킹엔 여전히 아주 노인이거나 아주 젊은 사람들만 있는 모양이었다. 널따란 탑골공원과 높이 솟은 어학원에서 나온 사람들. 그 외엔 한산했는데, 여기저기 임대 표지판이 많이 붙어 있었다. 종각 역 앞의 스타벅스와 만년필 전문점마저도 사라진 채 공실이었다. 변한 게 많아보이는 종로거리는 왠지 스산했다. 그 안에서 여전히 커피를 팔고 있을 한 여자가 떠올랐다. 

-

 여자는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오래된 상가에서 30년 넘게 커피를 배달하는 일을 하며 살아온 여자는 가진 게 없었다. 가족은 아프거나 힘들었고 커피 장사도 내리막길이 된지 한참이었다. 500원짜리 커피값마저 제때 지불하지 않는 고객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여자의 얼굴엔 평화가 깃들어 있었고 입술에선 사랑의 말이 흘렀다. 여자는 자신이 커피와 라면을 배달해주는 주위 상인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매일같이 작은 점방에서 성경을 펴놓고 기도를 올렸다.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를 처음 만나고 돌아온 날 나는 진짜 신앙이란 이런 거구나, 작은 예수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을 위해 섭외해 만난 여자였지만 이후 몇 번을 더 찾아가 안부를 묻곤 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헤어지는 길에는 항상 근처 건어물전에 들러 마른 과자라도 쥐어주고 싶어해 한사코 사양해야 했다. 

 여자를 마지막으로 본 건 2년 전 겨울이다. 근처에 들를 일이 있어 겸사겸사 찾아간 여자는 그날도 작고 빛이 들지 않는 좁은 가게에서 성경책을 펴놓고 있었다. 낡아빠진 목도리를 맨 차림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어서, 목도리라도 선물로 사들고 올걸...하고 잠시 아쉬워하는데 여자가 성경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신실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듣던 내게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단체의 요한계시록 설교가 유명하다고 말했다. 요한계시록.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마지막 챕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계시록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었다. 기성 교회를 다녀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며 내게 팜플렛을 쥐어줬다. 

 집에 가는 길에 검색해본 단체의 홈페이지에선 웬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재림예수로 소개하고 있었다. 

-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 거리를 다시 지났다. 종종거리며 커피와 라면을 배달하던 여자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한겨울 차가운 내 손을 잡으며 건강하라고 기도해주던 그 손은 그대로일까. 순간 버스에서 잠시 내려 찾아가볼까 고민했지만 하차 벨이 눌러지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거기 그대로 있을 것이다. 여전히 새벽기도를 다니고 성경을 읽으며 낡은 옷차림이지만 환하고 평화롭게 웃고 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현하고 있을 터였다. 변한 건 내 마음이었다.

-

 집에 와서는 턱관절을 위해 새로 맞춘 스플린트를 착용해보았다. 스플린트를 처음 맞췄을 때 느꼈던 이물감은 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낮에 지나온 오래된 거리를 생각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교차하던 그 풍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