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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12. 14:50

 

 동네 요가센터에 등록한 건 운동 때문이 아니었다. 운동이 목적이었다면 좀 더 번듯한 센터, 기구가 갖춰져있고 회원들이 그럴듯한 레깅스를 입고 나타나는 곳을 찾았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홍보페이지를 따로 운영하고 날씬한 선생님들이 화보같은 자세로 홍보 전단을 뿌리는 센터들. 동네 요가센터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 집에서 입고 있던 늘어난 반팔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가도 괜찮았다. 장소는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강당이었다. 운동보다는 동네 친구를 찾으러 간 내게 적당한 장소였다. 휴직기간동안 말동무가 되어줄 동네 친구, 이왕이면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드디어 개강날.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아무도 없어 혼자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제일 먼저 매트를 펴고 앉았다. 요가 수업을 들으러 온 회원은 여덟 명 남짓. 연령대는 다양했다. 여느 요가수업처럼 잔잔한 뉴에이지풍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선생님과 회원들이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 근데 저번에 그 택배는 어떻게 됐어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제일 앞에 앉아있던 한 회원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글쎄 그때 그 택배 그래서 앞집에서 찾아갔어요? 자초지종은 이랬다. 앞집 아주머니가 집을 비운 며칠 사이 식료품으로 추정되는 택배박스가 도착했는데, 앞집 아저씨가 도무지 택배를 들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거였다. 듣고 있던 옆자리 회원이 거들기 시작했다. 손은 여전히 합장을 하고 다리는 나비자세를 한채였다. 아니 우리집 양반도 택배가 안보인대! 그게 글쎄 문 앞에 버젓이 놓여져 있는데도. 그렇게 커다란 사이즈로. 근데도 보이질 않아서 못 들고 들어왔다는거 있지!

 아니 저희집도 그런데... 이야기는 선생님이 한마디를 거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했다. 아니 쌀을 시켰는데 제가 들고 들어오기 너무 무거워서 들어다 달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근데 글쎄 그걸 계속 까먹더라고요! 선생님은 요기니답게 길다란 팔로 휘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선생님의 말이라 그런지 회원들은 더 격렬하게 공감했다. 맞아맞아 쌀이 없으면 밥은 어떻게 지으라고! 대체 왜 택배가 안보인다는거야! 

 결국 그날 나는 한마디도 거들지 못했다. 핑퐁처럼 오고가는 남편과 택배 에피소드에 내가 거들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돌아가며 에피소드를 하나씩 꺼내놓고 나서야 수업은 천천히 시작됐다. 말하자면 50분 수업 중 15분은 근황토크였다. 입부터 풀고 몸을 푸는 플로우랄까. 그래, 그렇다면 나도 에피소드를 준비해야겠다. 동네 요가센터 첫 수업을 마친 날 나는 골똘히 남편에 대해 탐구했다. 남편이란...무엇인가.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택배란...무엇인가. 에피소드가 없다면 거들기라도 잘 해봐야겠다.  

 대망의 다음 수업날.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채였다. 합장과 나마스떼, 조용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인사를 나눴다. 근황토크가 시작될 차례였다. 역시나 맨 앞자리에 앉은 회원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아니 근데 403동에 있던 학원은 왜 문 닫은거야? 혹시 알아요? 아니 거기가 그렇게 싹싹하고 괜찮았는데... 

 나는 이번에도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날의 근황토크는 이른바 불법학원이었다. 등록하지 않고 영업하는, 소위 공부방. 회원들은 어느 공부방이 남아있고 어느 공부방이 진도를 잘 빼는지에 대해 한참 정보를 교환했다. 결론은 역시 멀더라도, 공부방보다는 학원에 셔틀을 태워 보내는 편이 낫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아직 학원을 보낼만한 나이대의 자녀가 없는 회원들은 자신의 오래 전 경험담을 보탰다. 아니 글쎄 제가 학교다닐 때도 공부방이 있었는데요... 그랬는데 말이죠... 모든 대화는 속전속결로 이루어졌고 이야기는 금새 결론에 다달았다. 마치 잘 짜여진 소그룹 분임 토론을 보는 것 같았다. 주제를 던지를 사람이 있고 핑퐁처럼 받아치는 회원이 있었고, 선생님이 개입해 이야기가 풍부해지면 이윽고 짧고 또렷한 결론이 내려졌다. 남편들 눈에는 택배가 보이질 않는다, 가까운 공부방보단 먼 학원이 낫다, 땅땅땅.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수업날. 나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도 근황토크에 끼지 못한다면 차라리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곳은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센터는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회원 중 누구도 선생님의 자세를 제대로 따라하지 못했을 뿐더러 요가보다는 오십견 방지 스트레칭에 가까웠다. 근황토크 주제를 던지곤 하는 핵심회원이 오십견 환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나 음악이 깔리고 나마스떼와 동시에 셋, 둘, 하나. 오십견 환자이자 핵심회원이 뒤를 돌아보며 토크주제를 던졌다. 매번 주제를 던지는 그녀에게선 마치 <강심장>이나 <세바퀴>와 같은 왕년의 떼토크 MC, 강호동이나 김구라같은 풍모가 엿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는 현란한 떼토크 속에서 언제 발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말석 출연진이었다. 입술만 달싹달싹하는. 그녀가 주제를 던진다. 셋, 둘, 하나, 나는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일동 긴장) 

요즘 단지장 가보신 분? 닭강정 아직 팔아요?

 아... 오늘도 역시나 나는 근황토크에 끼지 못했다. 요일마다 돌아가며 열리는 장터에 나가본 적은 있지만 닭강정을 사먹어 본 적은 없다. 물론 이제와 부랴부랴 사먹어봤자 다음 수업날의 근황토크는 또 다른 주제가 될 게 뻔하다. 게다가 나는 다른 건 다 좋아하면서도 튀긴 닭은 좋아하질 않는다. 나를 뺀 회원들이 열심히 닭강정의 양념과 닭의 신선도 그리고 닭강정 아저씨의 친절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심해진 나는 혼자 스트레칭을 했다. 동네 요가학원에 적응하기 이것 참 쉽지 않구나, 근황토크란 대체 무엇인가, 핵심회원의 랜덤 주제선정과 결론지음은 어떤 알고리즘을 통해 도출되는가, 떼토크에 끼지 못하던 한시절의 패널들의 마음을 이젠 알겠다, 무엇보다 나는 왜 여기에 다니고 있는가...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