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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9. 25. 12:55

 

 오래된 이 블로그의 글들을 정리하기 위해 닫아둔 동안 읽기와 쓰기에 대해 생각했다. 읽어야 쓸 수 있지만 써야만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읽기는 그 자체로도 삶을 충족시킨다. 읽기와 쓰기를 모두 병행할 시간이 없기도 했다. 밤잠을 설치고 나면 침대에 길게 누워 책을 읽는 편이 편했다. 허리를 세우고 앉아 타자를 치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들르는 곳도 아닌데 열거나 닫는 게 무슨 소용이람, 하는 삐딱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책을 한 권 내고나니 한 챕터가 마무리됐다는 느낌도 들어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만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무엇보다 편했다. 써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가끔 워드를 열어 쓰고 퇴고하지 않은 채 두었다. 익명의 방문자들을 떠올리면 쓸 수 없었던 이야기들도 더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우연히 본 풍경들에 대해, 아기를 키우는 일에 대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기만 하는 미래에 대해. 쓰다가 멈추고 완성하지 않기도 여러 번. 어차피 누구도 보지 않을 이야기니까. 

 그런데 왠지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휴직일기>라는 이름의 워드 파일을 계속해서 덧붙여 나가면서 조금씩 써나가고 있지만, 왠지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다른 플랫폼을 기웃거려봤지만 플랫폼이 바뀌자 글의 스타일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제목을 잘 뽑아야 했다(난 역시 제목 뽑는 덴 소질이 없다). 한 번에 눈길을 잡아챌 수 있을만한 글쓰기, 확실한 소재, 중간중간에는 적절한 사진으로 읽기의 호흡도 배려해야하는 플랫폼. 가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도 플랫폼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쓸 수 없었다. 너무 소소하고 너무 시시한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그렇게 워드의 <휴직일기>파일에서 혼자 쓰거나 다른 플랫폼들을 기웃거리며 뭔가가, 아주 약간만 모자란 상태라는 자각을 했다.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글을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생각해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는 우습게도, 스팸메일함에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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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을 조금 첨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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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제목들의 스팸들을 정리하다 멈칫했다. 다정함을 조금 첨부다니, 스팸인줄 알면서도 클릭하고 말았다. 클릭하자 붉고 푸른 글씨들이 난무했다. 흥분제를 판다는 확실한 스팸이었다. 하지만 저 제목이라니. 다정함을 듬뿍도 아니고 조금 첨부했다니.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이인데, 그리고 심지어 스팸인데 일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모르는 누군가가 제목에서만 가장한 다정함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아주 약간 움직이기도 하는구나. 비록 그 자리에서 1미리미터정도 옆으로 옮겨간 것이라 할지라도. 내게 필요한 것도 딱 이 정도의 다정함이었구나. 큰 제스처나 상찬은 내게 가당치도 필요치도 않았다. 우연히 발견한 스팸메일함의 제목에서 발견한 '조금의 다정함', 내용까지는 갈 필요도 없는 딱 그 만큼이 내게 필요한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 블로그를 열었다. 생면부지의 다정함을 1그람만 얻기 위해서. 알기도 하고 알지 못하기도 하는 익명의 독자들을 위해서. 읽기에는 다정함이 필요없지만, 쓰기에는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텅 빈 워드에는 모든 것이 있지만 다정함 1그람, 그게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있다. 2008년 첫 글을 시작으로 지난 10년간 시시한 글줄이나마 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글을 클릭해서 읽어준 익명의 누군가가 가진 1분 1초가 딱 1그람의 다정함이다. 좋아서든 싫어서든 그냥 우연히든 이유완 상관없이. 

 다음 챕터를 여는 데 거창한 변화가 필요한 줄 아니었는데 아니었다. 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무엇이 쓰게 하는지, 왜 쓰는지를 조금씩 알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내게는 다음 챕터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다음 챕터다. 

 

 

 

 

 

| 2019.10.09 22:56 | PERMALINK | EDIT/DEL | REPLY
비밀댓글입니다
남태평양 | 2019.10.10 12:41 신고 | PERMALINK | EDIT/DEL
저 어렴풋이 기억날 것 같아요! 베를린과 영화음악이라니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일 것 같은데... 방송을 통해서 여기까지 오시게 됐다니 뭔가 쑥스러운데도 너무 좋네요. 짧은 댓글에서도 다정함과 유려함이 듬뿍 느껴져서, 앞으로도 뭔가 계속 써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어요.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이 되었어요:)
프리지아 | 2019.10.10 14:3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웰컴백
남태평양 | 2019.10.15 09:2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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