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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1. 22:21

(<조커> 스포일러 포함) 

 

 

 

이해로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해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이가 적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간다. 이해받고 싶어서 또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해해야 인정하고 또 사랑하게 되므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이해를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고 인정하는 일의 매커니즘은 희한해서 때로는 불가해한 대상에 더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이해해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서 사랑하게 되는 일도 흔하니까. 이런 종류의 매혹은 그 대상의 알 수 없음이 짙어질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문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해시켜야 사랑받을 수 있느냐, 불가해의 영역에 둘 때 더 빛날 것이냐. 이는 전적으로 수용자에게 달려있는 문제다. 우리는 다만 확률이 높아 보이는 쪽으로 배팅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이해받을 때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쪽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판단했다면, 잘 해야 한다. 잘 이해 시켜야 한다. 

 <조커>를 보고 나오는 길에 생각했다. 만일 이 영화에 영혼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영혼은 <조커>의 제작을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게 틀림없다. 아무리 호아킨 피닉스가 미친 연기를 한다해도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조커는 이해가 닿지 않는 영역에 있을 때 더욱 빛났는데, 이 영화를 통해 그렇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명백해졌다. 한국 아침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 영향을 받았나 싶을만큼 구구절절한 조커의 과거, 출생의 비밀과 학대와 세상의 냉대가 무리할만큼 한 캐릭터를 극단을 몰아간다. 자, 봤지? 이래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냐고! 이래도 조커가 되지 않고 배겨낼 재주가 있냐고! 이런 과거가 있어서 이 캐릭터가 지금의 조커가 된거라고!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아 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구절절한 이해에의 시도가 끝난 뒤, 조커에 대한 나의 애정은 사라졌다.

 이중의 실패였다. 애초에 이해가 필요하지 않은 대상을 이해시키려했던 그 시도가 실패였고, 그나마도 이야기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다. 아서가 조커가 될 수 밖에 없는 과거와 맥락은 영화 안에서조차 서로 충돌하며 잡음을 일으킨다. 조커를 조커로 만드는, 살인에조차 일관성이 없다. 어머니가 친어머니일 때는 효자지만(세상에 조커가 효자다...) 충격적인 과거가 밝혀지자 그 역시 응징의 대상이 된다. 자신에게 잘해준 동료는 살려주지만 뒷통수를 쳤던 동료는 죽인다. 합리적 살인(?)처럼 보이지만 어떤 장면에 이르면 우리가 익히 알던 그 혼돈의 살인마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에 이르면 조커가 사람을 왜 죽인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진다. 응징하고 싶은 대상을 처벌하는 것인지, 다만 목적도 이유도 없는 카오스적 행위인지. 

 마지막 장면의 뜬금없는 각성과,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나오자 왠지 멱살이 잡힌 것만 같았다. 이래도?! 이 정도라고! 짧지 않은 140분여의 러닝타임을 통해 조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만방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캐릭터를 이해해주기 바라는 애절한 구애의 몸짓, 하지만 그 끝에 마주하는 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조커의 탄생이라면. 이렇게나 비참한 과거를 짊어지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과거가 없어도, <조커>이전의 조커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었는데. 

 극장을 나오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해라는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도 힘들고, 그 좁은 문을 제대로 통과해내는 건 더 힘들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모두 성공적으로 완수해 이해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린다. 처음엔 이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곡해 혹은 오해에 가까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