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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7. 01:10

 

 길을 건너기 시작할 땐 언제나 초록이 아홉 칸 중에 일곱 칸 이상 남아있다. 이 정도면 충분해, 확신을 가지고 건너기 시작한 횡단보도는 생각보다 길다. 초록은 생각보다 빨리 무너진다. 붕괴의 시작은 언제나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서, 모두 무너지기 전에 나 하나쯤은 건너갈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중간즈음에서도 상황을 알기는 힘들다. 아직 네 칸이 남아있고 나는 막 절반을 지나왔으니까 이대로만 가면 세이프다.

 어, 한 칸이 더 줄어들어 초록이 세 칸 남은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아직 길을 다 건너지도 못했는데 옆에 선 차의 운전자들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 대는 심지어 앞으로 나오고 있다. 든든했던 아홉 칸의 초록은 순식간에 텅 비어간다.

 초록은 균일한 속도로 무너지지 않는다. 두 칸 정도 남았을 땐 두 배로 빨리 무너진다. 이젠 가방을 부여잡고 양 옆을 살피며 뛰어야 한다. 이번에도 실패다. 횡단보도의 넓이와 내 걸음걸이의 속도, 시작부터 뛰어야할지 걸어도 괜찮을지를 가늠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왠지 나라면, 저 초록칸이 다 무너져내리기 전에 안전한 건너편으로 무사히 착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뛰지 않고 사뿐한 걸음으로 걸어도. 양 옆에 호시탐탐 지나가길 기다리는 차들이란 애초에 없는 것처럼. 하지만 세계는 인정사정 없고 룰은 정해져 있다는 걸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가까스로 보도에 착지한 후 머리를 쓸어넘기며 흠흠 헛기침을 해봤자 이미 허둥지둥한 뒤다. 자신의 속도를 제대로 모르고 횡단보도에 뛰어들면 사소하게 볼품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대단히 볼품없는 존재가 차라리, 이런 경우보단 낫다. 

 이미 차들은 신나게 악셀레이터를 밟는 중이다. 세계의 속도를 가늠하는 데 곧잘 실패하는, 무너지는 초록 앞에 선 행인의 불안. 사소하고 시시하지만 쿵쾅대는 가슴은 한동안 불안의 기운을 머금는다. 그러니 스스로의 속도를 언제나 가늠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엔 건너야 할 횡단보도가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