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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3. 23:14

 

싫은 것 : 신념

진짜 싫은 것 : 강한 신념

진짜 진짜 싫은 것 : 강한 신념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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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간의 사회생활을 돌아보는 요즘이다. 손꼽게 힘든 몇몇 순간들이 있었는데 대체로 강한 신념형 인간을 선배로 두고 일할 때였다. 자기 확신이 강하다 못해 넘쳐나 남들 - 여기서 남들이란 주로 만만한 후배들이다 - 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실행하게 하고 싶어하는 군상들과 함께 일할 때는 정말로, 일의 기쁨과 슬픔 밸런스가 와장창 무너진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가 아니라 난 이렇게 생각하니 니가 이걸 따라주길 바란다. 네? 

 아주 작고 사소한 판단이라도 모두가 다르게 내리는 데는, 제각기의 기준과 가치판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의외로 그 기본 전제가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프로듀서 직군 중에 또 유의미하게 많다. 프로듀서들과 협업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프리랜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방송사 제작 파트에서 피디 외의 다른 직군은 대체로 계약직이거나 프리랜서니까.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강하게 반박할 사람이 주위에 없는 채로 오랫동안 일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가 진짜로 언제나 맞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옳고 그름이 너무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선명하면... 그거 정말 주변 미쳐버리게 만드는 일이다. 

 어젠가 너무 힘이 들어 후배 하나 그리고 선배 하나에게 아이스 쵸코를 마시러 가자고 청했다. 들큰하고 맛은 없는 아이스 음료를 들이켜다가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이제 진짜 협업이 너무 싫어요. 내가 뱉은 말인데 왠지 낯설고 또 마음에 탁 걸렸다. 생각을 하고 한 말은 아니고 진짜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뱉은 말이었다. 사실 요즘 그런 생각을 하긴 했더랬다. 차라리 일주일에 한 편씩이라도, 혼자 오디오 다큐멘터리만 만들면서 회사 다녔으면 좋겠다고. 기획도 섭외도 취재도 편집도 그냥 혼자 하는 1인 시스템으로. 그러니 순간 내가 뱉은 그 말도 거의 진심 100퍼센트에 가까운 말이긴 했을 것이다. 이제 진짜 협업이 싫다. 남들이랑 일하는 게 싫다. 잘 하진 못해도 좋아하니까 그냥 혼자 계속 다큐만 하고 싶다. 

 집에 오는데 왠지 내가 한 그 말이 맴돌았다. 그리고 덜컥 무서워졌다. 협업이 점점 싫어지는 나 역시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남들과 같이 일하는 방법이라곤 모르는 것만 같은, 포용의 틈이라곤 없는, 강한 신념형 인간들을. 타인의 가능성을 거의 믿지 않은 채 자신의 가능성만 극한으로 밀어붙여 탄생하는 게 강한 신념형 인간들 아니던가. 사람이 싫어지고 같이 일하는 게 싫어져가는 내 안에도 이젠 그만 나 위주로 가고 싶고 일하고 싶다는 그런 싹이 이미 자라고 있는 게 아닌가, 신념만 강하지 않다 뿐이지 패턴은 똑같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반성을 조금 해보았으나 그래도 요즘 너무 힘든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