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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27. 12:00

 

 몇 해 전, 나 혼자 멘토로 여기는 L작가님과의 자리에서 글을 주로 어디서 쓰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L작가님은 당연하다는 듯 집에서 쓴다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혼자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잘 쓰는 사람은 어디서든 잘 쓰는구나. 저런 작가라면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 같은 곳에서도 정좌한 채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쓸 수 있을 것이다. 아기1이 중장비 책을 가져와 읽으라고 명령하고 아기2가 쌍자음 옹알이로 따따 짜짜 빠빠 격렬하게 호소하더라도(쌍자음 옹알이는 왠지 욕처럼 들린다). 그런 게 프로의 세계일까. 주위에서 난장판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의 일로 순식간에 몰입할 수 있는 전환의 힘. L작가님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겐 없는 것 같았다. 한창 공부를 할 때도 책상부터 정리해야 하는 스타일이었고, 책상 정리 후 마음 정리를 위해 MP3라도 꽂아두면 30분이 그냥 흘러갔다. 오븐도 디젤차도 아닌데 일종의 예열이 필요했고 사전답사를 다녀와야 했다. 

 책을 들고 스타벅스에 뜨듯미지근히 앉아있다 돌아오는 길에 전단지 한 장을 밟았다. 새로 개업한 카페 홍보 전단이었다. 무려 24시간, 무인 카페인데 그것도 로봇이 서빙한다는 놀라운 문구가 쓰여있었다. 로봇이라면 카페에 손님이 아무리 나 하나라도 눈치볼 일도 없을테고, 밤에 아이를 재우고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커피 맛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책상에 의자에 쿠션에 거리두기 간격에 커피 맛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책상순례길 위에서 백발노년을 맞을지도 모른다. 쫓기는 걸음으로 빠르게 걸으니 십 분 안에 카페에 도착했다. 왕복 이십 분이라면 적당히 운동이 되고 예열도 될테니 완벽하다. 

 24시간 무인로봇카페. 정직한 간판이 달린 외양은 어쩐지 코인 빨래방에 가까워 보였다. 빨랫감 대신 노트북 봇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섰더니 어쩐지 바깥보다 평균기온이 낮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가본 그 어느 카페보다도 넓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구 정면에 카운터가 있고 벽 너머 주방 어디선가 사람의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완전 무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키오스크로 주문하시면 로봇이 갖다드립니다, 문구대로 따라가 키오스크 앞에 섰다. 서빙을 맡은 로봇은 카페 한 켠에 서너대가 얌전히 일렬로 대기중이었다. 일 미터쯤 되는 키에 얼굴로 추정되는 부위가 직사각형으로 넓고 컸다. 몸통 가운데가 뻥 뚫려있고 컵홀더가 네 개, 그 밑에는 간단한 베이커리를 올려둘 수 있는 쟁반이 달려 있었다. 바퀴가 달려있고 혼자 움직인다는 것만 빼면 주방에서 흔히 쓰는 트롤리와 비슷했다. 

 출동을 기다리는 로봇 서버들을 옆에 둔 채 라떼를 주문했다. 자신이 앉을 테이블 번호를 입력하면 로봇 서버가 자리까지 가져다준단다. 커피를 만들지는 않고 서빙만 하는 모양이었다. 카페의 구조와도 연관있어 보였다. 모로 긴 카페는 기차 식당칸처럼 길었다. 사람이라면 지치겠지만 로봇 서버라면 카운터에서 꼬리칸까지 백 번 왕복을 한들 덜 힘들 것이다. 벽 너머 어디선가 커피를 내리는 소음이 작게 들려왔다. 카운터 뒤에서 조그맣게 감지되던 인기척은 바리스타였을까. 텅 빈 카페를 한참 구경하는데 커피가 도통 나오질 않는다. 분명 손님이 나 혼자 뿐인데...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린지는 오래인데 어디선가 출발하지 못한 로봇 서버의 홀더 위에서 식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가서 가져올까,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데 멀리서 지잉 하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일렬로 줄지어 있던 로봇 대열들 중에 누군가 출발한 것이다. 황급히 도로 앉았다. 사람이라면 중간에 만나 커피를 들고와도 괜찮겠지만 로봇 서버에게 그런 일은 입력되어있지 않을 것이다. 지잉지잉지잉, 왠지 긴장되는 기계음과 함께 단조로운 클래식 선율이 함께 흘렀다. 

 34번, 주문하신 따뜻한 카페 라떼 나왔습니다. 잘 저어서 드세요. 기계음 어조가 분명한 로봇의 몸통에 내 커피가 들려있었다. 로봇에게 커피를 쏟을까 조심스럽게 꺼내 한 모금을 맛보았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그냥 커피 맛. 두 모금을 마셨다. 여전히 맛있지도 맛 없지도 않은 그냥 라떼의 맛. 세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도... 로봇이 떠나가질 않았다. 커피를 꺼냈는데도 여전히 내 곁에 선 채였다. 손님 곁에 머물며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커피의 농도가 적절한지 살펴보는 세심한 동작까지 입력되어 있는걸까? 이유가 뭐든 부담스러웠다. 얼굴로 보이는 부분을 잠시 쳐다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카운터 안에 있던 인기척이 내 곤란함을 알아주지 않을까. 로봇의 앞뒤를 둘러봤지만 내 쪽에서 뭔가를 지시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는 쪽으로 밀고 갈 수도 없었다. 기능이야 단순하지만 그래도 로봇이니 고가일지도 모른다. 다 마신 잔을 내려놓아야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는걸까. 아직 뜨거운 라떼를 꿀꺽꿀꺽 넘겼다.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는데 이상하게 초조했다. 

 로봇 서버를 곁에 세워둔 채 어색하게 노트북을 펼쳐보았다. 일단 작업 공간으로 적당한지 가늠해봐야 했다. 그저 노트북을 올려두기만 했는데도 벌써 불편했다. 테이블은 저 앞에 놓여있었고 고정되어 있는 의자는 저 뒤에 자리했다. 타자를 치려면 팔이 자연스럽게 구부러져야 하는데 쭉 뻗어야만 노트북에 닿았다. 허리가 끙 하고 벌써 괴로움을 호소했다. 내 팔이 짧은걸까, 의자와 테이블 간격이 지나치게 넓은걸까. 둘 다 인 것 같았다. 의자와 테이블의 간격마저 기차칸같아서, 커피를 한 잔 손에 든 채 다리를 쭉 뻗고 차창을 바라보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앞에 무언가를 두고 일을 하거나 작업을 할 공간은 아니었다. 간혹 긴 의자에 눕는 사람들이 있는지 눕지 말라는 방송이 나온다. 손님은 나 혼자고 난 분명 앉아있는데, 혼자 괜히 뜨끔한다. 허공에 뜬 팔만 괜히 허우적대며 타자 치는 시늉을 하는데 역시나 곁에 선 로봇 서버가 거슬린다. 키오스크 옆에 붙어있던 카페 대표번호로 전화라도 해야할까. 내 불편한 기척을 눈치챘는지 로봇 서버가 소리를 냈다. 지잉 징 지잉 징... 올 때와 비슷한 지하철 정거장 알림음 클래식을 연주하며 동료들에게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로봇 서버가 떠나고 남은 라떼를 원샷했다. 짐을 챙겨 나가는데 로봇 서버들은 여전히 일렬로 서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 방금 내게 온 서버가 누구였더라. 그렇게나 오래도록 곁에 서 있었는데도 그 중 누구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