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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20. 12:15

 

 책상의 반대말은 아기다. 3년 전 처음으로 아기가 내 삶에 등장한 이후, 내 책상은 본연의 물성을 파괴당했다. 모습부터 용도까지 어느 하나 온전하게 남은 게 없어 떠올리면 마음이 아플 정도다. 요즘 책상 위엔 어쩌다 우리집에 들어앉게 된 아홉 마리의 구피와 친구들이 사는 어항이 놓여있다. 시커멓고 어른 주먹 두개만한 산소발생기, 어항의 온도를 체크하는 온도계, 그 옆으로는 물살이들의 먹이통이 줄줄이 자리를 차지한다. 물이라도 갈아줄라치면 미리 받아놓은 수돗물 대야가 올라가있다. 책상이라고 우리집에 실려올 때 이런 신세가 될 줄 알았을까. 기껏해야 책 몇권과 컴퓨터를 올리게 될 거라 생각했을텐데 이건 정말 너무한 하중이다. 어항에 관람객들이 몰릴 땐 아기 둘이 한꺼번에 책상 위에 올라타기도 하니 연약한 책상 다리를 볼 때마다 조마조마해진다. 

 꼭 책상에서만 무언갈 해야하는 건 아니다. 부엌엔 여섯 명까지는 족히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이 있었다. 스탠다드에이에서 맞추어 애지중지하며 쓰는 목재 테이블이었다. 밝은 오크 원목 위에 스티커와 매직으로 남긴 낙서가 남아있긴했지만 오히려 앉아있기엔 책상보다 더 편했다. 요즘 대세인 거실의 서재화를 염두에 두고 들인 테이블이었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아하게 내 할 일 하기,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기들아 엄마는 이제 책 좀 읽을게! 내 말만 음소거가 되는지 도통 반응이 없는 아이들에게 선포한 뒤 앉아 무언가를 시작하면, 읽다 접은 책의 가름끈을 다시 펼치기도 전에 발가락이 축축해진다. 기어다니는 아기가 발가락에 침을 줄줄 흘리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와 바닥을 탁탁 치며 아따아따아따따따하고 호소력 짙은 옹알이를 시작한다. 뛰어다니는 아기는 책상 위로 날듯이 올라와 자신의 책을 읽으라고 들이민다. 발가락을 잡고 호소하던 기는 아기가 이내 무릎까지 올라와 자신을 번쩍 안으라고 울부짖는다. 말을 하는 아기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전달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집에 있는데 자신들과 상관없는 무언가를 독립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번의 육아휴직을 거치며 집안의 주양육자가 완전히 엄마가 된 탓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일단 그들의 사정권에 들어가있는 이상 함께 뒹굴며 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책상은 무용지물, 식탁은 놀이공간. 마지막 시도는 화장대였다. 책을 몇 권 꽂을 수 있고 노트북을 간신히 펼칠만한 화장대를 새로 구입한 게 1년 전이다. 침대 바로 앞 화장대라면 아기들을 재우고 아무리 졸려도 딱 삼십 분은 앉을 수 있으리란 계산이었다. 뭐 거창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아니니 아주 좁은 공간이어도 충분했다. 화장대 전면 거울장에 로션들을 채워넣고 나자 딱 책 한권 펼칠 바닥이 남았다. 자기 전에 서른 페이지만 읽고 기록 세 줄만 남길 수 있으면 된다. 화장대 겸 책상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깬 후 엉금엉금 기어 잠깐 뭔가를 하자! 세 칸의 서랍이 있어 친구들이 보낸 편지를 정리해놓고 중요한 문서들도 철에 접어 잘 넣어두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사놓은 엽서들과 스티커들. 공간이 좁아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만큼은 사수하리라. 어느 아침 사원증을 찾으려 서랍 문을 열어보니 형형색색의 팬티 열 벌이 들어있었다. "여기 이제 내 팬티 서랍이야!" 뛰어다니던 아기가 득의양양한 미소로 바지를 벗고 팬티를 벗더니 내 서랍에서 새 팬티를 꺼내어 갈아입었다. 이후 다시는 서랍장에 내 물건을 넣지 못했다. 

 아기들과 함께 살기 전에도 어려울거라 상상하긴 했다. 티비에서도 보고 SNS에서도 보고 사촌 집에서도 보고 친구 집에서도 봤으니 우리에게도 정신없는 일상이 펼쳐지겠지. 거실은 온통 장난감으로 뒤덮이고 열 발자국에 한 번은 블럭에 찧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내 공간, 정확히 내 책상이 아예 사라지게 될 줄은 몰랐다. 정신없는 순간도 있지만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순간 역시 있기는...하겠지...막연히 짐작했다. 영화를 보면 왜 아이들을 재우고 가만히 밀크티를 탄 뒤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든가 책을 보기도 하니까. 남들은 아이를 재우고 글도 쓰고 일도 다시 한다던데 왜 내겐 그런 순간이 도통 찾아오질 않을까. 우리집 아이들은 열한시에 겨우 잠들었고 자다가도 자주 깨 밤새 보초를 서는 기분였다. 재우고 가만히 책상에 삼십 분을 앉아있기가 어려웠다. 공간의 문제이자 시간의 문제였다. 

 책상이 없다면 책상을 사면 되지만, 내겐 책상이 없을 뿐더러 앉을 시간도 모자랐다. 둘 다 부족해지자 일상이 몹시 피로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한 뼘 공간도, 한 조각 시간도 없는 삶. 샤워를 할 때조차 문을 활짝 열어두고 기는 아기와 뛰는 아기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하는 신세(지적 수준에 차이가 있어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퍼포먼스는 쉽지 않다). 불과 3년만에 나는 아기 이전의 삶을 전생처럼 느끼게 되었다. 잠에 들면 어렴풋이 잔상이 떠오르긴 하지만 현실감은 없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 신문 주말판을 보고 카페에서 베이글을 먹으며 잡지를 읽고 씨네큐브에 들러 영화를 보고...이것은 분명 현생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생을 이렇게 흘러가게 둘 순 없었다.

 일단 사라진 책상부터 찾기로 했다. 집에 없으면 집을 나가서 찾자. 그렇게 책상 유랑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