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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19. 11:11

 

 어두워진 뒤 남부지법 앞에서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머릿 속으로 다른 존재가 비집고 들어올 것만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빙의가 되려는 건가?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집에 오기는 했지만 증상이 이따금씩 계속됐다. 특히 저녁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심해져어느 날인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야 했다. 내과에 들러 피검사며 심전도검사도 했지만 이상한 데가 없어 그냥 걱정하고 가끔 울며 지낼 때였다. 

 얼마 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그 때가 떠올랐다. 이제는 공황장애 증상 같은 것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어 낯설지 않지만,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증상이 마음의 문제란 건 몰랐다. 열두 시간 넘게 내리 방청했던 시범 국민참여재판의 내용이 어린 내게는 쇼크였고 트리거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제서야 짐작할 뿐이다. 어디든 병원,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다. 버스에서 내려 눈 앞에 보이는 한의원에 무작정 들어간 건 불이 켜져 있어서였다. 퇴근 시간이 지난 후였다. 간판은 걸려있지 않았지만 '한의원 개원 준비중' 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고 그 옆엔 지금도 진료중이라는 안내가 덧붙여져 있었다. 

 2층이었나 3층이었나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환하게 밝혀진 한의원 안에선 몇몇 사람들이 내부를 정돈하고 있었다. 개원을 앞두고 이리저리 집기를 배치중인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러저러해 진료를 좀 봤으면 좋겠다고 하니 선선히 그러라고 해주어 고마웠다. 진맥도 보고 이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뜸도 뜨고 한 시간 가까이를 탕약 냄새가 은은한 한의원에서 누워 쉬었다. 진료를 마칠 때는 무슨 환을 권하며 한 달 정도를 먹으면 컨디션이 훨씬 좋아질거라고 해, 40만원인가를 결제하고 환을 받아왔다. 검고 동그란 초콜릿처럼 생긴 환이 서른 개 정도 들어있는 금장 박스를 챙겨 나오는 길엔 한결 나았다. 돈이 아까워 환은 일단 챙겨먹었는데 그 덕분인지 차츰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나아가는 줄도 모르고 살던 어느날, 자주 타던 노선의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그 한의원 앞에 섰다. 한 달도 넘게 시간이 흘러 이젠 정식으로 간판이 달려 있었다. 저기가 그 한의원이네 그때 참 감사했는데... 애틋하게 쳐다보는데 간판에 적힌 이름이. 

 

탈모 전문 한의원

 

 어, 하고 눈을 치켜뜨는 사이 버스는 다시 앞으로 내달렸다. 명동의 복잡한 건물들과 사람들 사이로 탈모 한의원의 간판은 점점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 편 아주 목 좋은 건물의 2층인가 3층, 아무리 봐도 똑똑히 탈모 전문이라고 쓰여있던 간판의 굵고 힘찬 글자체. 짧은 순간이었지만 탈모 한의원이란 건 확실했따. 난 머리숱 너무 많은데... 10여년 후 원형탈모의 고통을 겪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20대 초반의 나는 텅 비어가는 버스에서 혼자 괜한 배신감을 느꼈다. 탈모라니 난 머리숱 너무 많아서 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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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은 줄도 모르고 낫고, 나는 줄도 모르고 나면서 산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데 잔디처럼 자라나는 새 머리카락이 한가득이다. 이리 넘겨도 저리 넘겨도 길이 들지 않는 새 머리카락 몇 웅큼들. 아기를 낳고 갑자기 여기저기 동그랗게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 꿈에서도 비명을 지른 게 얼마 전인데 나는 줄도 모르는 사이 여기저기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원형탈모의 대가가 대학병원을 나와 개업했단 얘기를 듣고 강서구 어딘가를 찾아갔던 건 아주 전생처럼 까마득하다. 이젠 언제 다시 퍼머를 할 수 있나 그런 걱정만 하며 산다. 

 탈모 한의원에서 환을 지어먹고는 미국에도 다녀오고 저녁 노을이 내릴 때 버스를 타고 한강대교를 지나다니며 센티멘탈에 잠기기도 했다. 지하철은 지금도 잘 타지 않지만 버스 탈 일이 있으면 즐거워하며 잘 탄다. 그 시절 버스에서 내려 급히 찾았던 한의원도 여전히 성업중이다.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 편 그 자리는 아니지만 가끔 체인점 간판을 볼 때마다 기억하려 한다. 나은 줄도 모르고 나았다는 걸, 그게 축복이라는 걸. 몸이든 마음이든 어딘가 아파 괴로워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은 줄도 모르고 나아서 사세요, 하고 마음 속으로 기도한다. 정체불명의 검은 환을 씹어먹는 사이 비싼 약값이 억울해서든 진짜 약발이어서든 아프다는 것조차 잊었던 오래 전의 나처럼. 십 년쯤 후엔 사람들과 밥을 먹다 우스개로 써먹을 수 있기를.

 때론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도움이 온다. 한 달치 환을 다 먹고 다시 찾았던 그때 그 한의원, 원형탈모 부분탈모 전두탈모 환자들 틈에서 나 혼자 풍성한 머리숱을 자랑했던 그 로비 풍경은 참 뜬금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뜬금없는 곳에서조차 스위치가 탁 올라가 깜깜하던 사방을 순식간에 밝힌다. 그렇게 마음이 나은 줄도 모르고 낫고, 머리카락이 나는 줄도 모르고 나며 살아간다. 모르고 살아가는 게 축복이라는 것 하나만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