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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9. 13:33

 

 

 도리도리가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얘기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 집 아기는 도리도리를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데 싫을 때는 어느새 도리도리를 한다. 10개월에 접어든 아기에게서 새로운 증상이 발현됐다. 바로 이유식 거부.

 4개월무렵 처음 이유식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먹는 거라면 뭐든 잘 받아먹고 가리지 않아 은근히 즐겁고 뿌듯했다. 한 끼에 이만큼이나 먹었다구! 듣는 이도 없는데 혼자서 자랑했다. 손톱보다 작은 이로 야금야금 오물오물 뭔가를 씹어 삼키고 또 입을 아 하고 벌린다. 아기 새처럼 작은 입에 숟가락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입가에 묻은 밥풀들을 닦아내면 끝. 이 행복하던 식사시간은 이제 사라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이유가 있긴 하겠지?) 아기는 이유식을 전면거부중이다. 식탁의자에 앉혀 숟가락을 입에 가져대면 입을 꽉 다물고 도리도리 혹은 멀리 떨쳐내기. 비슷한 시기에 이유식 거부가 오는 경우가 많다기에 이것저것 다른 방법들을 시도해봤지만 여하튼 아기는 지금 먹는 게 싫다. 그렇다. 인생 10개월차에 드디어 싫은 게 생겼다. 강하게 의사표시를 한다. 도리도리도 하고 고함도 꽥 지르고 손으로 밀어내기도 하고 도망도 간다. 

 아기에게 좋고 싫음이 강력하게 생긴 건 말이 늘면서부터다. 8개월 무렵까진 엄마, 아빠, 맘마 정도만 하던 아기가 최근 한달 사이에 어휘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음메 멍멍 꼬꼬 짹짹을 시작으로 귤, 물, 까까, 빵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인지하고 말하기 시작했다. 물이 마시고 싶으면 물, 귤이 먹고 싶으면 귤, 까까가 먹고 싶으면 까까. 말할 수 있게 되자 좋고 싫음이 탄생했다. 귤, 바나나, 까까, 분유, 이유식은 모두 다른 맛이고 다른 좋음과 싫음이다. 입에 들어오는 걸 대충 다 맘마라고 뭉뚱그려서 먹일 수 있는 단계를 지나버린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좋고 싫음에 대해 나는 무기력한 외부자다. 아기의 머릿속에 들어가 좋고 싫음의 회로를 바꿔놓을 수도, 좋고 싫음에도 불구하고 가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납득시킬 수도 없다. 아기도 이제 인간이 되어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들을 남이 바꿔놓을 수 없듯이 아기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아직 대화가 통하지 않지만 아기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분명히 존재하겠지. 내가 좋아함과 싫어함에 어떤 기준이 있듯이.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좋음과 싫음에 대해 남들이 참견할 때가 가장 싫었다. 좋은 것은 좋아하도록 두고 싫은 것은 그저 싫어하도록 놔두었으면, 그게 내 10대 시절의 소박한 바람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미성년자라 한들 혹은 10개월차 아기라 한들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고유한 세계는 오로지 그 자신의 것이니까. 키우고 책임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세계를 훼손하거나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아기의 이유식 거부는 언젠가 끝나겠지만(영원히 밥을 안 먹고 살 순 없을테니)아기에게서 작고 고유한 세계를 발견한 지금, 나는 왠지 서운해진다. 언젠가부터 그 눈빛 뒤에 자리한 또 다른 영혼을 본다. 내 몸에 꼭 붙어있던 태아와 신생아 시절을 거쳐 이제 오롯한 한 인간의 형태를 갖춰가는 자의식을 본다. 내가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언젠가는 이해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를, 나와는 다른 인간의 탄생을. 

 아기는 요즘 걸음마를 연습한다. 아직은 내가 손을 잡아주고 있지만 해가 바뀌면 그 손도 놓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로, 다른 세계와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배울 차례다. 아마 내가 평생 배운 것 중 가장 어려울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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