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177)
A (177)
(150)
아기의 비밀 (17)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A/글'에 해당되는 글 150건
2024. 4. 10. 13:34

 

 한림 근처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아주 빠르게 우리를 스캔하더니 재빨리 돌아섰다. 핑크색 행주와 파란색 유리세정제를 양 손에 든 채였다. 렌트카 번호판을 단 우리 가족의 차를 스쳐간 남자는 우리 곁을 지나 새로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량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자가 내리고 짧게 이어지는 대화. 거절, 무안한 제스처, 웃음. 또 다음 차가 들어오고 남자가 다가갔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에게 다가가 짧은 제안, 빠른 거절, 머쓱한 인사. 남자는 장을 보는 동안 유리를 닦아주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남자를 지나쳐갔고 그을린 얼굴에 캡모자를 쓴 남자는 마트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요즘 가끔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중학교 때 다녔던 공부방 선생님이다. 댁에 가서 수학을 배웠는데 수학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고 혼불이나 태백산맥을 빌려보았던 기억만 선명하다. 당시 내가 한창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있다고 하니 이 책들도 재밌을 거라며 권해주었는데 역시나 새벽 늦게까지 밤을 지새며 빠져들었다. 선생님 댁엔 대하소설도 많았고, 당시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책 대여점에선 볼 수 없는 단행본들도 많았다. 숏컷에 눈매가 야무졌던 선생님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50대 여자였다. 당시 대학생 정도 되는 자녀분들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십대 중반이었으니, 왜 서울대 수학과를 나왔는데 동네에서 공부방을 열었는지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20년이 지난 이제는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선생님 댁을 떠올린다. 잘 다듬어져 있던 베란다 정원, 거실에 풍족하게 꽂혀있던 대하소설, 아이 둘을 키우고 공부방을 열어 중고등학생 수학을 가르치던 서울대 출신의 중년 여성. 나도 이젠 서울대를 나와 아이 둘을 기르며 이모님 두 분을 모시고 아슬아슬 회사를 다니는 30대 후반 여성이 되었다. 삶을 단순하게 결정할 수 없게 되고보니 20년 전의 공부방 풍경이 마음에 아프게 박힌다. 시간을 넘어 돌아간다면 선생님과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물어보고 싶다. 이제는 다 잊어버린 최명희의 혼불을 찬찬히 다시 읽으며.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준엄한지, 또 일 그 자체의 의미는 내게 무엇인지 정말로 매일 곱씹는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으로 시간을 견뎌낸다는 걸 잊지 않으려 자주 두리번거린다. 주위를 살피다보면 가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서글픈 표정을 훔쳐보고 나면 죄책감과 동질감,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온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지금이 터널이기를, 이왕이면 밀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잠깐 숨을 참으면 한 번에 통과할 수 있는 터널이길 기도하면서. 

 

 

2024. 3. 29. 15:56

 

 맡은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관계자 징계를 받았다. 프로그램이 특별히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또 다시, 그럴 시기가 되었을 뿐이다. 사명감도 지향점도 사라진 지 오랜데 왜 내가... 하고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들 때가 종종 있어 최근 재밌게 읽은 위화의 <형제> 서문을 곱씹는다. 이 한 문장을 붙들고 적당한 책임을 지며 시간을 건너가야겠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했는데 저 혼자 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웃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회가 병들었다면 그 사회 구성원 역시 병들었을 테고, 다른 부분이 있다 한들, 그저 증세가 다를 뿐이겠지요. (중략) 노르웨이 작가 입센이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내가 왜 <형제>를 쓰게 되었는지 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2024. 1. 29. 18:20

# 수유리 우동

 연말 건강검진에서 주렁주렁 나온 이상소견들을 위해 병원을 한 군데씩 다니는 중.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늦은 오후까지 공복이었더니, 병원에서 나오자 세상이 핑 돌았다. 마침 가까이에 시장이 있어 찾아 들어간 수유리 우동. 김밥천국만한 크기에 사람이 꽉 차있고 배민 콜도 정신없이 들어오는 와중에 사장님이 놀랍도록 손님을 잘 챙긴다. 첫째가 군대 갔다면서요? 아니 그 애기가 언제 군대를 갔대... 다른 손님이 데리고 온 아이 둘에겐, 원래 쫄면 못 먹지 않았냐며 많이 컸다고 틈새 감탄. 적당히 다정한 참견을 지켜보며 바빠도 다정하고 유능한 사람을 지켜보는 개운함을 느꼈다. 바빠서 거칠다, 불친절하다, 이런 건 핑계다. 그냥 원래 불친절하고 커뮤니케이션에 무능한 사람일 뿐. 아니, 그런데 배가 너무 고프면 때론 만사가 힘들어지긴 하는데... 

 

# 산책

 배고프지 않게 우동 한 그릇을 다 먹고 아현시장에서부터 광화문까지 걸었다. 신경종이 있는 발이 거슬렸지만 오랜만에 배가 부르고, 공기도 나쁘지 않고, 아주 춥지도 않아 적당했다. 가구 골목에선 가구점에도 들르고 (구)게스트가 출마를 위해 현수막을 크게 걸어둔 앞에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벙커원을 지나고 무너질 것 같은 아파트를 지나고 철길 떡볶이를 지나는데 길에 구경할 곳들이 많아 발이 아픈 것도 잊었다. 골든브릿지증권 앞을 지나는데 10여년 전 연대활동..을 위해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했다. 나는 10년 전에 믿던 것들을 이제 거의 믿지 않게 되었는데, 

 

# 켄 로치

 믿는 사람의 표본인 켄 로치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겨우 들어간 영화관. 불이 꺼지자 고개가 같이 떨어졌다. 통잠을 자본 게 언제였더라. 잠깐 졸았다. 두 시간 가까운 꽤 긴 러닝타임, 드라마틱함 없는 예상 가능한 전개, 다소 밋밋한 인물들, 웅변톤의 대사. 그 모든 단점들을 극복하게 하는 주인공의 촌스럽고 우직한 몇 마디 때문에 결국엔 또 켄 로치에게 설득당했다.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추잡하고 악랄하겠지만, 누군가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선의를 향해서 나아간다. 지치지 않고 계속 믿는 힘을 가진 놀라운 감독. 잠깐 햇볕을 쬔 기분이었다. 

 

 

 

 

2024. 1. 13. 10:36

 2005년에도 걷던 길을 2024년에도 그대로 걸으며 나 이 길을 정말 좋아하지, 하고 곱씹을 줄은 몰랐다. 다섯시 오십분에 출근해 일을 다 마치진 못한 채로 점심 시간에 광화문엘 갔다. 성곡미술관 근처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고 장욱진 전시회를 보고, 덕수궁 앞에서부터 신문로 앞까지 잠시 혼자 걸었다. 맑고 춥고 조금 소란스러운 광화문. 카페 아모카도 스폰지하우스도 없어졌지만 그 길을 걷도 있는 순간만큼은 다른 것들을 생각할 필요 없는 혼자가 된 것 같아 홀가분하고 개운했다. 여기엔 뭐가 있었는데 없어졌고 여기엔 뭐가 있었는데 사라졌네... 혼자 길 위에서 들고 나는 것들을 셈해보며 잠시 걸었다. 택시를 타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와 못 다한 일을 저녁나절까지 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지만 광화문에서 잠시 걷고 온 하루는, 나만 알아볼 수 있을만큼만 풍족해졌다.

다음 금요일엔 꼭 리빙을 봐야하는데 그때까지 상영하고 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 각본은 꼭 영화관에서 봐야하는데. 혼자 조바심을 내면서 다음 광화문을 기다린다. 맑고 추운 길을 혼자 걷는 상상만으로도 잠시 온 몸에 기운이 돈다.
 
 

2024. 1. 13. 10:31

 

 아이의 애착인형이 뜯어지다 못해 솜이 비져나오기 시작했다. 오래 전 베트남에서 사온 물고기 모양 인형으로, 다시 구할 수도 없어 2년 전 첫 분실 사건 때 동네 카페에서 다정한 분이 새로 만들어준 것인데. 2년 반을 하루도 빠짐없이 모든 곳에 들고 다니다보니 또 이리저리 해지고 천이 터졌다. 시어머님이 임시방편으로 덧대어주셨지만 낡은 천 가운데 새 천을 덧대자 오히려 더 비어져나왔다. 방법이 없었다. 민망한 마음은 접어두고 2년만에 동네 카페 아이디를 클릭해 연락을 드렸다. 남은 천이 있다면 좀 팔아주십사하고. 

 다정한 분은 흔쾌히 아예 보수공사를 해줄테니 인형을 택배로 보내라셨다. 아이에게 상황을 잘 설명하고 인형을 병원에 며칠간 입원시키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우체국에 달려가 락앤락 봉지에 담은 인형을 부쳤다. 호이안의 작은 수공예품점에서 너를 처음 살 때는 이런 물건이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은 거의 인형에 영혼이 깃든 느낌이다.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마음으로 우체국 등기를 띄우고 일주일을 조마조마했다. 잠들기 위해 누웠다가 인형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재우고, 검은 새벽에 뛰어나와 방송을 하고, 하루종일 아이템을 정하고 조율하고 뭔가를 수습하고...집에 돌아오면 아이와 같이 인형을 기다렸다. 수술이 오래 걸리나봐. 겨울이라 아픈 환자들이 많은가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다정한 분으로부터 곧 도착할거라는 메시지가 왔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달려와 박스를 열었다. 물고기 인형이 세 마리나 들어있었다. 원래 가지고놀던 크기의 인형이 두 마리, 그리고 손바닥만한 새끼 물고기 인형 한 마리. 세 마리 가운데는 직접 그리고 글을 써 실로 묶은 동화책이 놓여있었다. 물고기 인형을 정말 좋아하던 한 아이가 놀다가 그만 인형을 놓쳐버리고, 인형은 물고기로 변해 바다로 가서 멋진 친구를 만나 아기 물고기까지 낳고 가족이 되어 다시 아이에게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주황색 실로 꽁꽁 묶어 제본한 도화지 책을 읽다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매일 보는 사람들의 악의에 지치기도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어 다시 살아가기도 한다. 지치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소생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아무리 초연한 척, 상관없는 척 해봐도 역시 사람이 힘들고 사람 덕분에 덜 힘들어진다. 해지고 닳은 물고기 인형 한 마리를 보냈다가 가족 물고기를 선물받은 아이는 손이 모자라도록 인형을 들고 다닌다. 잃어버리면 어쩌나, 지켜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할 때도 있지만 걱정부터 하지는 않으려 한다. 어떤 순간이든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은 꼭 나타난다. 나쁜 것은 얼른 잊고 좋은 것들을 더 오래 바라보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곱게 봉재된 인형 세 마리를 손에 들고 새해 첫 머리에서 혼자 해본 다짐. 

 

 

 

2023. 12. 7. 11:03

 
 일터에선 많은 일이 일어나고, 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 두 가지는;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일터의 기본 원칙. 한숨과 짜증이 잦은 사람은 동료로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내 한숨부터 단속해야지).
 뉴스든 물건이든 파는 사람이 일단 진짜라고 믿어야 잘 팔린다. 홈쇼핑과 시사프로그램을 비교하게 된 요즘 분위기가 마뜩찮긴하지만. 문제는 내가 대체로 믿지 못하는 편이라는 것. 요즘 저전력 모드다. 아니 아예 비행기 모드일지도.
 
 

2023. 11. 27. 17:13

 

 자기효능감을 거의 느끼기 힘든 프로그램을 하는 중이다. 효능감이 낮으니 시간 확보가 가능한가하면 거의 눈떠서부터, 눈 감을 때까지 이런 저런 일들로 범벅이다. 육아 외주에 드는 보육 비용은 엄청나게 늘었다. 월급-육아외주비용을 빼고 남는 돈을 셈하고 바닥에 떨어진 자기효능감을 더하면... 무엇이 남나 곱씹는다. 매일매일 시험에 드는 기분으로 출근한다. 그래도 만 14년을 일했더니 좋은 건, 이런 시기도 곧 지나갈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게 됐다는 것.  

 

 

2023. 11. 19. 19:55

 

 

이 짤은 거의 15년만에 처음 써보는 것 같다(연애시대였나, 선덕여왕이었나?). 아직도 가능했다니, 드라마 과몰입. 나 아직 할머니는 아니네. 여튼 14화 엔딩의 길채야아악 씬은 37년 드라마 인생에 길이 남을 장면이었다. 

 

 

 

2023. 9. 7. 23:52

 

1.

 일주일만에 다시 공항에 돌아왔다. 부모를 따라 작은 여행가방을 맨 아이들을 보니 다시 몸 어딘가에서 아기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컨퍼런스 기간 동안 무언가에 집중해 있을 때는 종종 잊었다. 내 뱃속에서 키워서 낳은 아기가 둘이나 이 세상 어딘가에서 말하고 걸어다니며 나를 그리워한다는 걸, 아기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짧은 망각의 순간은 눈에 아기들이 들어오는 순간 깨어진다. 낯선 장소에서 마주치는 서너살 남자 아기들, 국적 불문하고 드레스를 차려입은 대여섯살 여자 아이들. 갓난아기나 초등학생들은 절대로 망각을 깨지 못한다. 비슷한 실루엣과 표정과 몸짓이 눈에서부터 살아나야만 감각이 재부팅되기 시작한다. 서서히 깨어난 감각은 대체로 뱃속으로 내려가 어딘가를 간지럽히고 조금 죄기도 한다(아무래도 마음은 뱃속에 있는걸까?). 단절되었다 다시 연결되는 느낌이 싫지는 않다. 단절되었다는 것도, 연결된다는 것도 모두. 

2. 

요즘 내가 바라는 것 : 새로운 노래를 들은 후 진심으로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되는 일. 계속 다시 듣게 되는 기적. 그런 기적이 다시 일어날까?

3. 

인천에서 쿠알라룸푸르로 오는 동안은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최은영 작가의 신간을 읽고나니 여섯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쓰지 못했던 잡다한 단상들을 기록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쓸 수 없었다. 쓰는 게 별로 어렵지 않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어렵다.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은 사람처럼, 입술을 열기가 어렵고 혀를 움직이는 게 거추장스럽다. 

 

 

 

 

 

 

 

 

 

 

 

 

 

 

 

 

 

 

 

2023. 9. 7. 23:21

 
밤의 거리는 살아있어서 소란하고 냄새를 풍겼다. 끝없는 사람들의 행렬, 도로 양 옆에서 신이 나거나 화가 난 사람들, 늘어선 매대 위의 음식들과 노점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과 씹고 삼키고 말하는 입들. 의지와 욕망으로 가득한 밤의 거리 한가운데서 아픈 신체를 드러내거나 아주 어린 아기를 데리고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환전해온 지폐를 가방에서 꺼내어 깡통에 넣는데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음식 냄새와 버스킹 소리를 감싼 마천루들 사이를 구경하는 일은 아주 생생한 지옥도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