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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5. 13. 10:52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를 아직 가지고 있어 가끔 스스로의 손글씨를 마주한다. 너무 못나서 생각했다. 아, 손글씨 쓸 일이 없어지니까 이렇게 글자 모양이 이상해지는구나. 다이어리를 덮으며 드르륵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는데 떠올랐다. 아, 이게 원래 내 필체였구나. 손글씨 쓸 일이 있을 때도 나는 이런 모양으로 글자를 적었지. 예전에도 동글동글하거나 날카롭거나 무튼간에 자신만의 필체가 뚜렷한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안 쓰다보니 못 쓰게 된 게 아니라 원래 못 썼던 걸 잊고 있었다. 매순간 얼마나 많은 합리화를 하며 살고 있는지. 

 

 

2022. 5. 12. 12:02

 

 과거만큼 안전한 여행지는 없다. 과거에서는 누구도 누구를 해치지 못한다. 일어날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나거나 끝났으며 진행중인 사건들 역시 치명적일만큼 놀랍지는 않다. 중간 결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희미해진 자리엔 비교적 좋았던 기억들만 남아 여행자들을 미소짓게 한다. 과거의 제국에 입장한 관람객들은 여기저기서 멈추어 서서 과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그 시절이 남긴 유산의 양에 놀라고, 기억이 가물거리면 사진첩이나 다이어리같은 해설지를 뒤적여본다.

 세상의 다른 박물관이나 유적지가 그렇게 하듯이, 입장객들에게 다만 오백 원씩이라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인류를 그보다 더 생생하게 보존해둔 곳이 있을까. 개인과 무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사진과 텍스트로 박제되어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00년 전의 생활상을 보듯 싸이월드에서 20년 전의 머릿속을 보고 놀란다. 여행이 끝나면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아쉬움과 홀가분함이 남는다. 입장료도 내지 않고 너무 놀라운 세상에 다녀왔다는 미안함과 함께. 

 

 

2022. 5. 12. 11:19

 

 딸아이는 늘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한다. 1년이 넘었는데도 다섯 번을 가면 세 번은 울며 들어간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데 나도 엄청난 등원 거부자였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아침에 화장실에서 일부러 나오지 않았고, 사회체육센터를 다닐 때는 셔틀을 타러 갔다가 나를 향해 오는 버스를 보고도 못 본 척 다른 곳을 쳐다보며 차를 놓쳤다(기사분이 클락션을 울렸던 것까지 생생하다). 또래들이 우글우글한 공간에서 몇 시간을 함께 밥도 먹고 놀이도 하고 잠도 자야한다니 상상만 해도...자신이 없어진다. 요즘도 누군가를 만나면 온 기운을 다 빼앗기고  허우적대며 겨우 돌아오는데 우리 딸아이도 그런 걸까. 

 문 안으로 아이를 들여보내고 나면 꼭 창문으로 선생님과 함께 나와 손인사를 하며 내가 돌아서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늘 웃다가 울고야 만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스크 위로 보이던 눈이 반달에서 여덟 팔자로 일그러지고 선생님이 아이를 안은 채 황급히 뒤로 돌아서면 나도 출석 어플을 체크한 뒤 돌아 나온다. 차라리 소리를 듣는다면 마음이 편할텐데. 소리 없는 울음의 모양을 보고 나오는 날이면 그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유리 너머 어렴풋이 보이던 울음의 모양, 들리지 않지만 그래서 더 잘 보이는 얼굴. 웃음에서 울음으로 변할 때 달라지는 근육들은 그 어떤 소리보다도 강렬한 이미지가 되어 잔상으로 남는다. 소리 없는 울음의 민낯은 얼마나 강렬한지. 

 

 

2022. 5. 11. 12:27

 

"두려울 게 뭐 있겠어요." 조급한 웨이터가 덧문을 내리고 일어나면서 말했다. "자신 있어요. 자신 만만하다고요." "젊고, 자신감 있고, 일자리도 있다 이건가."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만사에 부족한 게 없군."

"그럼 아저씨는 뭐가 부족한데요?" "일자리만 빼고는 모든 게 부족하지." "저처럼 모든 게 있잖아요." "아냐, 자신감이라는 건 가져 본 적도 없고, 또 이젠 예전처럼 젊지도 않아." "자, 이제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자물쇠나 채우세요."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고 싶어."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2022. 5. 10. 11:07

 

 허허벌판 위에 홀로 솟아있는 원색의 탑과 기둥들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선명했다. 들판에 들어선 주차장에 차를 대자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며 노래가 들려왔다. 블럭으로 외벽이 장식된 호텔을 지나자 정문이 등장했다. 붉고 푸른 옷을 입은 직원들이 블럭의 손처럼 자신들의 손을 디귿자로 모아 오그린 채 아래 위로 흔들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문을 통과하자 세상의 큰 것들을 죄다 옮겨둔 공원이 등장했다. 청와대, 여의도 63빌딩, 해운대의 주상복합건물, 산과 바다.

 블럭으로 이루어진 풍경들을 한참 보다가 왜 레고를 좋아하지 않는지 다시 알게 되었다. 무엇이든 조립하고 해체해서 세상을 구현해낸다는 그 컨셉 자체가 싫다. 크고 웅장한 자연물과 인공건축물부터 꽃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박스 안의 비닐봉지 속에 해체되고 축소된 채로 들어가 있고, 설명서대로 쌓고 조립해 다시 그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구상 자체가. 초등학교 무렵 즈음에 누군가에게서 얻어온 블럭을 한참 조립하다 아주 메스껍고 머리가 아팠던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였을까. 해체와 재조립을 싫어한다니 아무튼 조금이라도 나아가거나, 나아지기는 글러먹은 모양이지만 여하간 여전히 좋아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해체되지 않고 조립될 이유도 없는 세상에서 살고싶다. 그래도 조립과 해체가 가능한 세상 중에서 꼭 선택해야 한다면, 큰 것들을 작게 만들어 소유하기보단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을 크게 크게 확대해 바라보고 관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2022. 4. 29. 15:04

 

 2년에 걸쳐 세 번 보았다. 대형 수족관 속에서 한 시간 단위로 공연을 펼치는 사람. 갈 때마다 컨셉이 달라져 다른 의상을 입은 탓에 동일인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다녀올 때마다 인터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여기보다 조금 더 춥고 외따른 곳에서 살다 왔을 것만 같은, 어린 시절에 어떤 이유로 싱크로나이즈드를 배웠을 63빌딩의 인어공주. 가오리와 철갑상어떼 사이를 누비며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손키스를 날리는 사람. 점심으로는 무엇을 먹고 저녁에는 어떤 이불을 덮고 잘까, 꿈에서는 어떤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나눌까. 아침이 오면 운전을 해서 여의도로 출근할까.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만나자고 하면 날 이상한 사람으로 여길까. 63빌딩에 다녀올 때마다 떨칠 수 없는 인어공주에 대한 마음. 

 

 

2022. 4. 29. 14:18

 

 집 회사 집 회사를 반복하며 사는동안 잊고 있던 봄철 알러지가 다시 도졌다. 하루에 서너 시간은 밖에서 보내는 탓이다. 약을 먹고 하루종일 졸음이 와 헤롱대는데 몸도 마음도 한없이 쳐져 6집을 들으며 하염없이 동네를 빙빙 돌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마음을 스쳐지나가는 사이 만 보 정도를 걸었고 재채기는 더욱 심해졌지만 마음이 한결 나았다. 그래도 되나 싶지만 적어도 내게 음률이 주는 모든 멜랑콜리는 한 밴드에게서 온다. 언젠가 다시 라이브 무대를 볼 날이 올거라고 여전히 믿는다. 

 

 

2022. 4. 19. 11:32

 

 아침 일찍부터 소란스럽다. 장터가 열리는 날이다. 베란다에 서서 천막 갯수를 가늠해본다. 왼쪽부터 과일, 건어물, 해물, 채소... 즉석 돈가스와 닭강정, 분식집도 자리를 펼치는 중이다. 화덕피자를 구워내는 트럭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으로 마르게리따 피자를 사와서 먹기로 첫째와 약속을 해놓은 참이다. 사야 할 식재료들도 많다. 이제 막 돌이 된 둘째도 삶은 제철 감자의 맛을 보더니 한 알을 혼자서 다 주워먹기 시작했다. 새벽 출근하는 남편은 당근 라페를 넣은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첫째는 블루베리나 산딸기가 보이면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어린이집엘 갔다. 점심으로 먹을 돈가스도 튀겨 와야 한다. 유리 그릇 하나와 에코백을 챙겨 장터로 나간다. 화요일이기 때문이다. 휴직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요일에 대한 감각이다. 

  일을 할 때는 그 날의 방송으로 요일을 가늠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보통 일주일 단위로 주간 코너를 가지고 있다. 월요일은 책을 소개하는 코너, 화요일은 선곡 대결이 있는 날, 수요일은 디제이가 혼자 진행하는 날, 목요일은 라이브 코너가 있는 날... 이런 식이다. 모든 요일은 방송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금요일에 생방송을 하지 않는 경우엔 주말 방송분까지 사흘치를 열심히 편집해야 하는 날. 편집기 앞에 하루종일 앉아있다 샌드위치를 사와서 먹으며 3초, 5초, 10초씩 분량을 덜어내는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일을 멈춘 지 1년쯤 지나자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월요일엔 6단지에서 장이 열리고 화요일엔 우리 단지에서, 금요일엔 5단지에서 장이 열린다. 비슷비슷하지만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다. 6단지 장터에선 즉석도넛집을 좋아한다. 명태식해를 무쳐서 만 원에 파는 가게도 있다. 국은 끓이고 단품 요리는 해봤어도 밑반찬은 영 못하는 내겐 밑반찬 파는 집이 많은 장터가 동앗줄이다. 장이 열리는 날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각 단지를 다니며 하나라도 사온다. 미역국은 내가 해서 먹을 수 있지만 오징어채나 멸치볶음은 잘 못한다. 5단지 장터엔 그 날의 국과 김치를 담궈 파는 분이 계신다. 여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텅 빈 김치냉장고를 열무김치로 채워넣어야 점심을 굶지 않을 수 있다. 

  육아휴직 1년, 시간표가 프로그램 주간 구성안에서 주간 식단으로 바뀌어간다. 먹는 일에도 방송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방송보다 훨씬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방송은 재료를 잘 세팅해두면 어느 순간부터는 알아서 굴러가기도 한다. 성능 좋은 냉장고 안에 유기농 재료들을 칸칸이 잘 채워넣으면 어느 순간 요리가 완성되어 있기도 한 경우랄까. 주기적으로 냉장고가 비지 않게 재고 관리를 하고 요리의 마지막 단계에서 간에 신경을 쓰면 아주 큰 하자가 발생하진 않는다. 하지만 진짜 먹는 일엔, 단 한번의 '저절로' 도 허용되지 않는 편이다. 아무리 좋은 유기농 재료를 냉장고에 채워둔들 시간이 지나면 음식쓰레기가 될 뿐이다. 밀키트로 떼운다 하더랄도 불을 올리고 물을 끓이며 몸을 움직여야 한다. 밥을 열 번 짓는다고 해서 가면 갈수록 밥 짓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도 아니다. 한 끼를 해결하는 덴 언제나 만만치 않은, 그 날 분량의 새롭고도 놀라운 수고가 투입된다. 물론 가장 놀라운 건, 그렇게 밥을 지어 먹어도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배가 고파진다는 점이다. 

 입맛이나 먹을 수 있는 재료의 종류가 모두 다르단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 집엔 어른 두 명과 세 돌, 이제 갓 돌인 아이 두 명이 함께 살기에 조금 더 까다롭다. 앞니 몇 개로 대부분의 음식을 씹어먹는 둘째에겐 무른 음식들이 필요하다. 주로 소고기나 오징어, 야채를 함께 갈아 완자를 만들거나 데쳐서 준다. 남는 재료로는 어른들이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 소진한다. 아이 둘과 어른 둘이 먹는 일을 신경쓰는 데만 해도 일주일의 시간표가 빡빡하게 들어찬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써도 언제나 결과물은 시원치않다. 어찌저찌 장을 봐다가 무언가를 먹고 먹였다는 데서 위안을 삼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장을 보고 나면 주말이 온다. 일을 하지 않아도 금요일은 여전히 좋다. 주말이라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쉬워지진 않지만, 묘하게 달라진 다른 흥분이 있다. 한데 모이기 어려운 네 사람이 하루종일 어울려다니며 단합대회를 하는 느낌이다. 오트밀에 우유를 부어 다 같이 아침을 먹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 냉장고에 일주일 내 남아있던 잔반도 처리한다. 우당탕탕 모여 여섯 끼니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챙겨먹다보면 시간이 달아난다. 월요일이 다가온다고 출근할 일은 없는데도 왠지 마음이 저려온다. 뭔가 깜빡하고 처리하지 않은 일이 있는 것만 같다. 주말에 나가는 녹음방송에 광고를 제대로 넣었는지 스스로의 정밀성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제대로 된 노래 대신 MR을 심어넣은 건 아닌지 갑자기 초조해지는 일요일 저녁. 평일의 감각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주말이 끝나는 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때리며 온 몸을 관통해온다. 그래보았자 월요일이 되면 다시 6단지 장터를 향해 에코백을 매고 갈 뿐이지만. 

  육아휴직 1년. 수입은 줄었지만 먹고 사는 일 그 자체에는 한뼘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장터에 펼쳐졌던 천막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화요일이 절반 넘게 지나갔다는 표시다. 

 

 

 

 




2022. 4. 15. 14:01


 삼사십대 여자들이 낳은 아이들을 이십대와 육십대 여자들이 나누어 돌본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이십대가 많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려가는 이모님들은 압도적으로 육십대다. 아이들의 주양육자인 삼사십대 여자들은 일을 나가면서 이십대 여자들에게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9시간 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서 육십대 여자들에게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넨다. 다른 세대 여자들에게 아이들을 넘겨주었다 받는다.

 낳기 전에는 낳고 기르고 돌보는 일이 이렇게까지 여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줄 몰랐다. 나의 경우는 사적, 공적 도움을 총망라해 받는 편에 속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이 아닌 여러 여자들에게도 아주 많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녀들이 없다면, 한 순간에 도움들이 사라진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곧 아무 존재도 아니게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를 이러이러한 모양의 존재로 유지하게 도와주는 건 다른 세대의 여자들이다. 아이들은 이 품에서 저 품으로 옮겨다니며 안기고 업히고, 보드라운 손부터 검버섯 돋은 손까지 이 손 저 손으로 쓰다듬어지며 자라난다. 집을 청소하고 반찬을 만들어내는 데는 가끔 더 늙은 여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몇 달 전 마지막으로 집을 청소하러 온 여자는 등이 굽은 칠십대였다.

 여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젠더 문제에 대해 얄팍하게나마 귀동냥할 기회가 있었던 대학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몸으로, 생활로 느낀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고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어마무시하게 필요한, 여러모로 취약한 여자에 속한다는 것을. 돈을 지불하는 쪽이 나라 하더라도 이 관계는 언제까지나 호혜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돈이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관계의 정의가 수립되는 대부분의 이치는 여기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업무는 돈과 시간을 교환하는 데서 발생하지만 돌봄은 예외다. 돈과 시간을 교환하는 기본 거래 밑에 애정이 수반되야 한다는 치명적 조건이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무감하게 키울 순 없기에, 애정이 없는 돌봄은 아예 성립하질 않는다. 그러나 애정은 돈과 별개로 생겨나고 자라난다. 이 어려운 조건을, 애정어린 손길을 부탁해야 하는 쪽은 나다. 매일 아침 적어보내는 알림장 마지막 문장은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로 끝맺음한다. 앞으로도 꽤 많은 부탁합니다와 감사합니다 사이에서 오가야 할 것이다.

 오늘도 그들에게 업혀서 어그적 어그적 반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육아휴직을 하고 명목상으로는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는데도 여전히 그렇다. 그녀들의 심기를 걱정하고 건강을 염려한다. 내가 빚지는 이십대 여자들과 육십대 여자들의 마음과 몸이 튼튼하기를 늘 기도한다. 혼자서는 빚지지 않고 잘 살 수 있었다. 무자녀 기혼 여성일 때도 그랬다. 이젠,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도움은 대부분 여자들에게서 온다. 어떤 때는 발목이 무거운 것 같다가도 가끔은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이, 이런 모습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굴러가고 있었다는 걸.













2022. 4. 9. 10:14

 

 아이 둘을 양 팔에 하나씩 끼고 토닥이다 나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한밤인지 새벽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데 엄마, 엄마, 쉬했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눈도 뜨지 않고 더듬더듬 바지를 갈아입히는데 아 방금까지 꾸던 꿈의 몇 장면이 너무 생생하다. 첫번째 장면에서는 내가 샤넬 부츠를 신어보려 발을 넣고 있었다(샤넬? 여튼 꿈이니까). 부츠 안에 모양을 잡기 위해 넣어둔 종이 뭉치며 가죽을 감싼 비닐 포장이 아직 뜯어지지 않은 채인데 신발에 웬 사용설명서가 딸려있는 게 아닌가. 읽어보려는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거기선 야간분만이(라고 지칭해야 할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호칭이지만)쉐쿄바레 무뵤바레에 여전히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것도 비어있던 지난 몇 년간 계속. 그 일기장 속에선 여전히 날 것의 언어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어 간만에 설레는 독자의 마음으로 열심히 읽었다. 와, OOO작가님이 아니라 진짜 야간분만이 돌아왔다! 소리치면서. 그러다 세 번째 장면으로 넘어간다. 샤넬부츠, 야간분만, 그리고... 샤넬부츠, 야간분만, 그리고...그리고... 

 쉬 한 아기를 다시 토닥토닥 재우며 열심히 세 장면을 잊지 않겠다고 복기하며 잠들었는데... 무색하게도 지금은 기억이 안 나네. 부츠, 야간분만, 그 다음 마지막... 아주 중요한 장면이 하나 등장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