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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9. 7. 23:21

 
밤의 거리는 살아있어서 소란하고 냄새를 풍겼다. 끝없는 사람들의 행렬, 도로 양 옆에서 신이 나거나 화가 난 사람들, 늘어선 매대 위의 음식들과 노점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과 씹고 삼키고 말하는 입들. 의지와 욕망으로 가득한 밤의 거리 한가운데서 아픈 신체를 드러내거나 아주 어린 아기를 데리고 구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환전해온 지폐를 가방에서 꺼내어 깡통에 넣는데 어떤 생각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음식 냄새와 버스킹 소리를 감싼 마천루들 사이를 구경하는 일은 아주 생생한 지옥도를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2023. 9. 2. 15:25

 

 혼자 인천공항엘 왔다. 혼자서 외국에 나가는 게 정말로 10년만이다. 그간은 출장을 다니거나 여행을 다녀도 동료들이나 가족들이 늘 동행했다. 이번에도 출장이긴 하지만 혼자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를 타는 감각이 낯설다. 처음으로 혼자 외국행을 결심한 사람같다. 

공항철도에서 내리며 여객터미널로 들어서는데 설레임 비슷한 기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출장이 아니라 혼자 여행을 간다해도 아주 두근거릴 것 같지는 않다. 거꾸로 집으로 가는 방향의 공항철도를 탈 때는 설레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출국 당일 오전까지 정신없이 소아과를 데리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 큰 아이가 말했다. 아휴 나는 그래도 우리 집이 제일 좋은 것 같아. 근데 왜 집이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익숙해서 그런 것 같아. 아직은 만 네살이긴 하지만, 집이 언제나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휴우 하고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놓이는 곳. 매일 부대끼고 한김 식은 땀냄새가 나고 베갯잇엔 때도 스며있지만 그래도 떠날 때 못지 않게 돌아올 때 기쁜 곳. 

 10년만에 혼자 인천공항에 앉아 지난 10년간 무얼 했나 가만 생각해보니, 뚝딱뚝딱 내 집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2023. 8. 8. 07:37

 

 

 오랜만에 이석원 작가님을 만나고 돌아오던 저녁. 익숙한 빵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흰색 블라인드가 반쯤 올라가있는 뒤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불 꺼진 빵집의 전면유리 안에서 블라인드 절반을 올려둔 채 뒤로 반쯤 누운 사장님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밖을 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블라인드가 걷힌 공간에 맞춘 듯이 사장님의 몸이 들어맞았다. 천천히 횡단보도를 다 건너자 표정이 보였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눕듯이 앉은 사장님의 표정이 아주 어두웠다. 스치면서 눈길을 두는 것조차 미안하고 어려울만큼의 어두움이었다. 빵집 앞을 지나치는 게 서늘해져 방향을 꺾어 돌았다. 

 다음날 아침 긴장하며 빵집 앞을 지났다. 혹시 빵집에 무슨 일이 벌어져 있진 않을까. 슬로우를 건 것처럼 천천히 빵집 옆을 지나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 안을 살폈다. 아침 커피를 사기 위해 들른 사람들이 매장 안에 줄을 서 있었다. 깨끗하고 산뜻한 실내는 흐트러진 곳 없이 그대로였다. 반만 올라가있던 블라인드는 모두 같은 선까지 줄을 맞춰 올라가 햇볕이 고르게 들었다. 사장님은 어제 본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맥주캔을 들고 누워있는 대신 커피머신 앞에서 분주히 아이스 커피를 뽑고 있었다. 하얀 모자가 단정했다. 

 어젯밤의 빵집 풍경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뒤로 쓰러지듯 비스듬히 누워 창 밖을 바라보던 사장님의 실루엣도. 누구에게나 블라인드를 대충 내린 채 보란 듯 드러눕고 싶은 순간이 있고, 나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나는 맥주캔을 들고 누울 자리가 마땅찮아 주로 아름다운 것을 듣는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을 들을 때 내 표정은 아주 어두워서 어젯밤 블라인드 밑의 사장님 못지 않을지도 모른다. 길어야 5분도 되지 않게 드리우는 찰나의 어두움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틀어놓은 채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마음껏 그림자를 뒤집어쓰면 기분이 나아진다. 잠깐 음영 속에 몸을 담그면 다시 환한 곳으로 나갈 의지가 생긴다. 빵집을 돌아 지나며 사장님도 어젠 그림자에 실컷 좀 파묻혔을까,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생판 모르는 남 걱정을 했다.  

 

 

 

 

 

 

 

 

2023. 7. 19. 01:31

 
 감정이 둔탁해졌다. 기분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처음엔 좀 헷갈렸다. 매일 생방송을 하고 퇴근해서 두 친구들을 돌보고, 또 일어나서 생방송을 하러 나가고 또 퇴근해서 친구들을 돌보는 루틴한 일상 덕분에 잡념이 줄어든 줄로만 알았다. 아이들은 자주 아프고 또 자잘한 문제들이 늘 생겨서, 고민하고 해결하고 돌아서서 큐시트를 짜다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정말로 없기도 했다. 기분이 어떤지 무얼 느끼며 사는지 복기할 물리적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들을 제외한 곁가지를 잘라내보고 싶었다. 올해 나는 매일 이렇게 살았다. 6시 20분에 일어나서 묵상하고 스트레칭하고 방송사고 외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NPR 디스모닝을 듣고 일곱시엔 씻는다. 아침을 먹고 7시 40분엔 아이들을 깨워 등원 준비를 한다. 우당탕탕 멱살잡이 등원을 마치고 지하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이스 라테를 테이크아웃해서 사무실에 앉으면 9시 40분 언저리. 10시가 업무 시작 시간이니 가끔은 책을 한두꼭지 보기도 하고(유지혜 작가의 책을 처음 이렇게 읽었다) 오터레터를 읽기도 한다. 10시부터는 원고를 보고 수정할 부분을 찾고 선곡, 섭외, 그 날 방송에 관한 각종 자질구레한 것들을 정리하고 점심을 먹는다. 일주일에 한 번은 동기와 약간은 어설픈 공부를 하고 나머지 요일엔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 점심이 빈 날엔 멀리 걸어 카페에 가거나 아주 짧은 운동을 한다. 녹음과 생방송을 연이어 마친다. 회의를 한다. 이모님과 바톤터치를 하고 저녁 시간 돌봄을 시작한다. 11시 언저리에 자는 줄도 모르고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몇 번의 호출을 받고 깨어난다. 다시 6시 20분이 되면 알람이 울리고 성경을 몇 장 읽은 다음 디스모닝을 틀어두고 스트레칭을 한다.... 온에어가 들어오면 생방송을 한다... 회의를 한다... 섭외를 한다... 새로운 한글파일을 열고 그 날의 날짜를 넣은 다음 빈 칸을 이문세, 임영웅, 아이유로 채운다... (200번의 반복). 
 읽기는 했으나 쓰기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고 써서 뭘 하겠나. 저널은 오프라인 10년 다이어리에 간단하게 기록해도 된다. 일상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억에 남긴다. 목적이 있는 확실한 쓰기 외에는 쓸 필요가 없어보였다. 가끔 아, 저 장면을 쓰고 싶다... 는 욕구가 스치긴 했지만 이내 사라졌고 몇 번 무시하자 알람소리가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뚝 끊겼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줄어든 자리엔 물결~ 물결~과 말줄임표가 들어섰다. 기분과 감정을 모호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늘었다. 사건과 장면에 대한 리액션이 줄었다. 
 그 결과 얼얼해졌다. 아주 시린 추위에 오래 나가 있었던 것처럼, 피부의 일부가 마취에서 덜 깬 것처럼. 감정의 일부가 남의 것마냥 얼얼하다(고나마 인식한다는 게 다행일까). 원래도 희노애락의 진폭이 얕았는데 불편한 치마를 입은 것처럼 감정보폭이 좁아졌다. 문제는 내가 감정을 날 것으로 느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유형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엔, 쓰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한다. 기쁠 때는 기쁘다는 세 음절을 써 넣어야 기뻐진다. 슬플 때는 슬프다고 적어야 눈물이 흐른다. 괴로울 때는 죽고싶다고 써야 입술이라도 앙다물게 된다. 쓰지 않으면 도통 상태를, 감정을, 스스로를 진단하기가 어렵다. 만사를 글로 배운 부작용이 이런 걸까. 쓰기-인식하기-느끼기로 구성된 인간. 200번의 비슷한 하루를 보낸 2023년의 중간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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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한다, 고 혼자 생각하고 털어버리려다 동아리 후배가 나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아주 오랜만에 블로그를 열었다. J야 고마워, 네 덕에 오늘은 조금 쓰고 그만큼 느낄 수 있었어. 
 
 
 
 
  
  
 

2023. 5. 5. 11:57



이언 매큐언과 위화의 글들을 번갈아 읽는다. 비슷비슷한 책을 펼쳤다 얕은 상념과 피로한 감상에 잠기느니 반박 붙가능한 작품들을 계속해서 읽는 편이 훨씬 낫다.




2023. 4. 18. 21:13



아주 피곤할 때는 퇴근길에 다른 어떤 음악도 듣지 못한다. 오직 언니네이발관밖에는.



2023. 2. 27. 09:50

 

일찍 일어난 김에 이것저것 둘러보던 아침 나절, 외신 토막 중에 임파서블 익스펙테이션 오브 마더스.. 가 눈에 밟힌다. 토요일 아침 덜 끝낸 편집을 마치러 출근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급히 읽었던 <황노인 실종사건>의 한 대목과 함께. 아이를 키우며 산지 만으로 4년, 여전히 덜 죽은 자아가 가끔씩 꿈틀댈 때마다 날카로운 것을 찾아 급히 찌른다. 비대한 풍선처럼 부풀어있던 스스로의 자아의 한 부분을. 진짜 부풀어있긴 했던 모양인지, 빠지고 꽤 빠져 부피가 조금 줄긴 했다. 그래도 아직은 멀었다. 읽기는 해도 쓰는 일은 줄인다. 자아를 부풀릴만한 먹잇감은 주지 않는다. 좋은 과정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그러지 않으면 안 될 뿐... 

"Young Koreans have well-documented reasons not to start a family, including the staggering costs of raising children, unaffordable homes, lousy job prospects and soul-crushing work hours. But women in particular are fed up with this traditionalist society’s impossible expectations of mothers. So they’re quitting." 

 

"그 시절 불안했다. '나는 누구며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가 십대 후반 이후로 계속 미확정이었다. 돌이켜보면 미경의 결혼은 아버지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아이를 낳아 기쁘고 바쁘며 힘들었지만 그 질문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당시 그 질문에 대해 미경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자신의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늘 잠이 모자란 시절이었지만 밤잠을 자다가도 깨면 부뚜막에 양은 밥상을 펴고 앉았다. 겨우 확보한 조각 시간에 기껏해야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였다. 그 끄적임의 소재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아기를 포함해 뻔한 일상을 적는 일기 비슷한 글이거나 답이 없는 질문들이었을 거다. 다만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에 대해 끄적이는 게 미경에겐 절박했다.(...) 자신 안에 있는 딱딱한 이기의 깡치,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가장 우선. 목숨은 내놓을 수 있어도 자아는 포기할 수 없음. 응어리라는 표현으로는 도무지 성이 안 차는, 새까맣고 딱딱한 알갱이다."  

 

 

2023. 2. 10. 18:22


가로등이 일제히 팟, 하고 터지듯 켜지는 순간을 만나면 왠지 세상이 나를 환대하고 응원하는 것만 같다. 오늘 우리 동네의 가로등이 켜진 시간은 오후 6시 21분.


2023. 1. 16. 13:46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날이 저무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내 손목에서 피가 팔딱팔딱 뛰는 소리를 듣고 싶었고, 세월의 냉혹함과 달콤함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떠났죠. 사람들은 내가 책임감이 없다고 말했지만, 약간의 돈을 주기도 해요. 그 이후로는 산책을 하지요. 강을 보고 하늘을 보고,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사는 거죠. 그것 뿐입니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죠, 그렇겠죠?" 

 

 

2023. 1. 13. 16:01


커피를 사서 올라오는 길에 왠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회사 지하 단촐한 구내서점에 들렀다. 사고싶은 책이 영 없어 한참 몇 바퀴를 돌아 겨우 한 권를 골라내는데 사장님이, 죄송하다고 말씀하신다. 다양하게 못 갖다 놓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주문하면 되죠 하고 올라오는데 왠지 눈물이 났다. 다양하게 못 갖다 놓아서 죄송합니다…말도 안 되는 사과에 이상하게 목이 콱 막혀 하루종일 가슴을 치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