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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13. 22:03

 

 복직 2주차. 하루 세 시간의 녹음방송을 송출하려니 생각보다 허둥지둥할 때가 많고 여유가 없다. 그래도 열흘 남짓 지나니 어느정도 손에 익어 대충 다음 스케줄을 꿸 수 있게 됐다. 약간의 루틴도 생겨났다. 별 거 아닌 이 루틴이 사람을 참 든든하게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의 아주 사소한 루틴은 이거다. 일주일에 사흘은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 밥을 먹고, 하루는 밥을 먹지 않고 점심에도 일을 하고, 하루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는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책을 한 권 읽는 것. 이렇게 읽지 않으면 책 읽을 시간은 아예 낼 수 없다. 복직하면서 혼자 만든 이 작은 루틴 덕에 이번주의 씨네21과 '아무튼, 하루키'를 재미있게 읽었고(나도 아무튼 OO을 써보고 싶단 생각마저 들었다!) 베스트셀러라 미뤄뒀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기 시작했다. 이 좁고 좁은 상암동 바닥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오지 않을 카페를 알고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뒷춤에 아주 작고 단단한 차돌을 하나 말아 쥐고 있는 기분이랄까. 커피는 맛이 없고 선곡은 오락가락하지만 호밀샌드위치는 그럭저럭 먹을 만 하다. 주위에선 주로 뜨개질을 하는 소모임의 멤버들이 커피를 마시거나 아이들을 데려온 엄마들이 대화를 나눈다. 한 번도 꺼내본 적은 없지만 책도 엄청나게 많다. 적고보니 왠지 적은 게 후회될 정도로 아깝다. 앞으로도 나만 알고 몰래 가야겠다. 

 오늘도 비를 그으며 급히 걸어가 사십오분짜리 독서를 즐기고 돌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발목양말이 주룩 내려가있어 열심히 양말을 추켜올리는데 웬 시선이 느껴져 쳐다보니 새침하고도 세심한 눈빛의 초등학생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 이런 말풍선이 머리 위에 떠올라있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어른이 되면 공공장소에서 발목양말을 추켜올리는 아줌마는 되지 말아야지. 옷매무새는 꼭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정돈해야지." 

 너무 열심히 발목양말을 추켜올리던 나는 괜히 뻘쭘해져서 백스텝을 밟아 카페에서 나왔다. 마시다 만 커피를 손에 들고 급하게 걸어들어오는데 덜 올린 발목양말이 걸리면서 새침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 초딩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하얗고 말수가 적은 초딩들에게도 그럭저럭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이것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