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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3. 09:33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알쓸신잡에 채널을 멈췄다. 시즌1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챙겨봤는데 이후로는 영 눈길이 가지 않아 오랜만에 본 참이었다. 프로그램의 포맷대로 유희열이 가운데서 사회를 보고, 유시민과 김영하를 포함한 네 명의 패널들이 한참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에 대해, 국내의 오래된 유적에 대해, 소설과 세계와 사람들에 대해서. 과연 그들의 이야기는 유려하고 거침이 없었다. 와, 그렇구나... 그랬구나...하고 화려한 언변에 빠지려는 찰나, 엑스트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동도 없었다. 네 박사와 유희열 테이블 뒤로 포커스아웃된 두 테이블의 엑스트라가 있었다. 왼쪽 테이블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오른쪽 테이블에는 여자 두 명. 장소는 늘 그랬듯 어느 식당이었다. 식당이기에 엑스트라들의 밥상에도 역시 냄비가 하나씩 올라져 있긴 하지만, 엑스트라들은 아무리 컷이 바뀌어도 냄비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진즉에 다 먹어버렸을 수도 있고 제작비 절감을 위해 애초에 빈 냄비를 세팅했을 수도 있을 일이다. 


 냄비보다도, 내 눈길을 사로 잡았던 건 엑스트라들의 행동이었다. 식당 엑스트라라면 보통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법 한데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앞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며. 오른쪽 테이블의 두 여자는 각자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로 티비에 출연하지만 그들은 모두 따로 있었다. 일당을 벌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날 알쓸신잡의 배경으로 출연했던 흐릿한 엑스트라들은 모두 20대였다. 앞에서 네 박사님들과 셀러브리티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지식을 떠들 때, 뒤에서 숟가락 뜨는 시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앞만 쳐다보던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녹화가 왜 이렇게 길어지는지 수다는 대체 왜 끝나질 않는지 원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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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이 상암동이다보니 각종 촬영 현장을 자주 만나게 된다. 방송사들은 회사 근처에서 촬영하길 즐겨한다. 사무실 장면은 방송사 사무실에서, 복도 장면은 방송사 복도에서 찍는다. 며칠 전도 그런 날이었다. 집 앞 방송사 건물이 치킨회사로 둔갑한 채 촬영이 진행중이었다. 날은 꽤 추워서 나는 제일 두꺼운 파카를 걸쳐입고 시장을 보러 나간 참이었다. 촬영중이길래 아 정말 티브이는, 겨울에는 너무 힘들어...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촬영이 시작된 건 아니고 카메라를 세팅중인 모양이었다. 달리가 돌아가고 카메라가 위치를 잡는동안, 그 곳에도 역시나 배경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길을 가는 행인처럼 보여야 하는 사람들. 모두 멀쑥한 행인처럼 보이기 위해 짙은 모직코트에 얇은 정장바지 같은 것들을 받쳐 입은 참이었다. 살색 스타킹에 치마를 차려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들 어깨를 한껏 모은 채 촬영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그래서 길을 걸어가는 척이라도 할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달달 떠는 중이었다. 그 날 배경이 되기 위해 길거리에 서 있던 엑스트라들 역시 모두 내 또래였다. 20대 혹은 많아봤자 30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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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는 부쩍 배경을 살피게 된다. 배경이 되는 장면에 누가 있는지 또 어떤 사람이 들어가 있는지. 티비 속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주연은 언제나 주연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배경은 매일 바뀐다. 그날 그날 대체 가능한 사람들로. 그리고 그 배경은 언제나 내 또래일 때가 많다. 아직까지 확고한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배경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할까 고민한다. 모두가 화면의 가운데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의 바깥에, 포커스 아웃되는 공간에, 언제나 너무 많은 내 또래들이 서 있다는 건 여전히 눈에 밣히는 일이다. 허공을 바라보며 목적지 없이 걷다가 컷 소리에 멈추거나 빈 냄비를 앞에 두고 휴대폰만 바라보는 배경에 너무 젊은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화면의 중앙을 가득 채운 중년의 박사님들은 화장실도 못 가고 앉아있는 배경의 청년들에게 신경이나 썼을까. 하다못해 촬영이 끝나고 수고하셨어요, 인사는 했을까. 요즘은 배경을 곱씹을수록 좀 서글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