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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6. 20. 15:16

 

 요즘 가장 부러운 부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누구를 만나도 머리모양만 보인다. 길을 가다가도 드라마를 보다가도 심지어 나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보다가도 머리모양에만 눈이 간다. 아 저 사람은 뿌리 볼륨감이 상당하구나. 아 저 사람은 머리숱이 적어서 펌을 해도 모양이 잘 안나오겠구나. 저 사람은 막 미용실에 다녀왔구나(제일 부럽다).

 요즘 가장 귀찮은 일은 바닥에 흘린 머리카락 줍기다. 머리카락들이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로 몸에서 탈락해나가고 있다. 어쩌다 한번 머리를 쓸어넘기기만 해도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 가득 머리카락이 모인다. 속절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좋은 샴푸를 써도, 두피마사지를 해도, 심지어 머리를 감지 않고 버텨봐도 머리카락은 빠진다.

 얼마 전 미용실에 갔을 때 물어봤다. 머리카락은 언제까지 빠질까요? 200? 아니면 6개월? 머리 빠지는 게 멈추면 파마를 할 참이었다. 아기가 생긴 이후 한참 머리에 손을 대지 못해서 자연인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게 언제나 걸렸다. 6개월정도 지나면 대충 호르몬들도 정상으로 돌아올테니 머리카락도 그만 빠지지 않을까. 그럼 파마 해도 되겠지. 희망을 가지고 물었는데 약간은 맥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빠질 만큼 다 빠져야 멈춰요.”

 결국 파마는 기약하지 못한 채 머리를 자르기만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 머리카락은 지금쯤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걸까. 빠질 만큼의 초반부에 막 돌입해서 가속도를 붙이려 하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어 서서히 새 머리카락을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귀 옆으로 내려와있는 잔머리를 몇 가닥 만지작거려봤지만 역시나 머리카락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만지면 만지는대로 또 빠질 뿐). 100일이든 200일이든 1년이든, 빠져야 하는 만큼의 분량을 채운 뒤에야 멈출 수 있으니 머리카락도 그저 쓸려나가느라 무력하기만 할 것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분량이란 건 있지만 그 분량을 소진하는 시간은 다르다. 누군가는 100일만에 그 머리가 다 빠져버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1년에 걸쳐 빠지기도 한다. 드물고 또 운좋게는 분량이 조금 적게 주어지기도 해,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런지 모른다. 어쨌든 분량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분량을 채워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분량을 채워야 끝이 나고 또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멈춰있다. 그것도 한 가운데. 머리카락들은 미친듯이 빠져나가고 다음이 언제 올지는 아직 모른다. 1인칭의 세계에 딱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나로 시작하고 나로 끝난다. 그렇다면 여기 멈춰선 채 흘려보내야 하는 나의 분량은 얼마만큼일지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빠져야 다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기 시작할지.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지. '나'로 시작하는 1인칭을 벗어나 자유로운 3인칭의 세계로 돌입할 수 있을지. 그래서 비로소 나 말고 타인에게도, 의미가 생길지.

내게 주어진 지금의 분량을 알지 못해 오늘도 이렇게 1인칭 기록을 남기며 머리카락을 줍는다. 정말 많이도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