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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13. 14:23

 

 

 안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샤워를 할 때마다 데자뷰가 스쳤다. 뜨거운 물을 목덜미에 붓고 있으면 밀려드는 아주 어릴 적의 기분들. 아늑하고 나른한데 별 일 없는 평일 오후에 외출했다 돌아와 6시에 하는 만화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

 그 중에서도 목욕탕의 풍경이 자주 보였다. 평일 오후 느지막이 목욕탕 데스크에 값을 치르고 여탕 문을 열면 밀려드는 뜨끈한 수증기, 안경에 서린 김이 가시기 전에 눈 앞에 보이는 모습. 평상을 가운데 둔 채 옷장들이 미음자 형태로 탈의실을 채우고 있고, 평상 위에는 입는 중인지 벗는 중인지 알 수 없는 중년의 여성들이 부끄럼 없이 드러누워 재방송 중인 일일연속극을 보고 있다. 일일연속극 속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 중 한 명을 욕하는 것 같은데 그마저도 따스하고 구수하게 들리는 평일 오후의 목욕탕. 그 누구도 절박하거나 바쁜 표정 없이 그렇게 꾸벅꾸벅 어제 본 드라마를 보다가 잠시 잠에 빠져도 괜찮은 나른함. 침을 닦으며 평상에서 일어나 집으로 가는 길엔 시장에 들러 몇 가지 채소를 사고 또 이런 계절이면 붕어빵을 한 봉지 살지도 모른다. 

 한참 목욕탕 기분에 푹 빠져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다시 2019년의 우리집 욕실. 헐벗고 다같이 누워있던 평상은 온데간데 없다. 다른 욕실에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왜 여기는 언제나 다를까, 생각하다 외부로 바로 맞닿은 작은 창을 보았다. 초겨울 늦은 오후의 어렴풋한 햇볕이 불투명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한기와 온기가 동시에 전달됐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 앉아 보던 비슷한 풍경. 안쪽의 수증기와 바깥의 한기를 차단해주면서도 이어주던, 작고 불투명한 창이 거기에 있다. 

 그 창 밖으론 상인들의 소음이 들린다. 뻥튀기 기계 소리가 주기적으로 큰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튀겨댄다. 작은 규모로 요일마다 서는 시장이지만 채소가게와 어물전, 과일가게와 두부 파는 상인이 두루 와서 일주일치 장을 보기에 모자람이 없다. 손바닥만한 시장이라 아기를 데리고 아무리 천천히 돌아봐도 십 분이면 끝에서 끝에 도착한다. 단감과 고구마, 감자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엔 언제나 떡볶이 포장마차 앞에서 잠깐 멈춤. 혹시 오늘은 물떡이 있을까? 간장에 푹 찍어먹을 수 있도록 퉁퉁 불려진 오뎅 옆의 가래떡. 하지만 서울의 분식집에선 단 한번도 물떡을 본 적이 없다. 맛있다고 할 수는 없는 맛인데 추워지면 이상하게 자꾸 먹고 싶은 맛. 아주 퉁퉁 불기 전, 오뎅 국물을 적당히 잘 머금은 상태의 가래떡이어야 하는데 집에선 결코 따라할 수가 없다. 

 집에 돌아와 옷에 묻은 한기를 털어내며 아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추워서 양 볼이 빨개진 채 눈동자를 이리 저리 굴리며 오늘 본 풍경을 되새기는 모양이었다. 강아지 두 마리를 보았고 한 마리는 동네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손!' '앉아!'를 훈련받는 중이었다. 생선가게에선 조그만 다라이에 담긴 미꾸라지들이 튀어나올 듯 헤엄쳤고, 옆에서 튀겨지는 옥수수 강냉이 냄새가 고소했다. 흥미롭고도 잔잔한 그 질감들은 아기의 작은 머릿속 어딘가에도 작은 보따리에 쌓인 채 자리잡을까. 그런 조각들이 모이고 모이면 유년의 질감이 되어, 언젠가 비슷한 실마리를 잡는 날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풀어져 나오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느꼈던 포근함과 안도감, 세상은 충분히 흥미롭되 무서운 곳이 아니리란 작은 믿음까지. 

 내 유년의 질감들은 대체로 무난한 포근함과 일관된 안정감같은 것들이다. 세상 밖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은 적당히 만족스러운 작은 세상. 이제는 내가 다른 존재를 위해 만들어내는 공기에도 그런 질감이 섞여 있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좀 더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감각들이었으면 좋겠다. 말랑이고 따뜻하고 구수한 것들. 서툰 솜씨로 만드는 요리가 끓는 소리나 동네 풀밭에서 만난 예쁜 단풍 한 장.

 그런 유년의 질료들이 모이고 모여 언젠가 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의 풍경을 만들어내리라 믿는다. 내 감정풍경의 근본에 동네 목욕탕의 불투명한 창으로 올려다보던, 따뜻하고 차가운 공기와 한낮에도 재방송되던 일일드라마 소리가 낮게 깔려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