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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7. 13:29

 

 

 슬럼프가 이런 건가, 생각했던 한 달여가 지나갔다. 일이 이렇게 재미없기는 또 오랜만이었다. 업무수첩을 뒤져보니 어느 날은 이런 메모가 적혀있다. "휴직각이다 ㅅㅂ".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을 것이다. 욕은 언제나 마음 속으로만 하니까. 다만 마음 속으로 욕지기를 뱉는 날이 잦아졌고 회사 화장실에서 거울이라도 볼라치면 깜짝 놀랐다. 어두운 표정의 웬 아줌마가 나를 어찌나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앞뒤가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한 심정이 조금이라도 트인 건 의외의 장소에서였다. 코로나가 조금 덜해진 틈을 타, 주말 아침 개장시간에 맞춰 도착한 아쿠아리움. 어둡고 조용한 아쿠아리움 지하 1층의 작은 수족관에서 가든 일이라는 물고기를 만났다. 장어의 일종이라는데 얇고 연약한 빨대처럼 생겨 몸의 절반은 모래 속에 파묻은 채였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그나마 밖으로 나와있던 절반의 몸마저 모래 속으로 싹 사라져버리고 없다. 다른 물고기들이 근처에 다가가도 그랬다. 모래 속에 절반은 숨긴 채, 위험하다 싶으면 재빨리 눈만 남겨놓고 온 몸을 모래속으로 숨겨버리는 그 재빠름에 감탄했다. 찾아보니 큰 위협을 느끼면 아예 모래 속에 머리마저 숨겨버려, 아주 한참동안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두 달만에 모래 밖으로 다시 나왔다는 가든 일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밤이면 가든 일 사진을 찾아봤다. 분양받아 키운다는 사람들의 후기도 봤지만 역시 키우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아기 한 명도 쉽지않은데). 대신 가든 일 사진을 휴대폰에 띄워두고 틈만 나면 쳐다봤다. 커다란 눈 때문에 겁은 많아 보이지만 몸의 절반을 숨겨둠에서 나오는 평화로움이 좋았다. 언제든 도망칠 모래더미가 주위에 가득한 것도. 여차하면 머리까지 파묻어버리고 조류가 한 차례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될테고, 어차피 플랑크톤을 먹고 사니 모래톱 안에도 먹을 거리가 없진 않을 터였다. 그야말로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가든일 사진을 볼 때마다 결심한다. 더 자주 도망쳐야겠다. 더 많이 도망쳐야겠다. 도주의 굴을 파고 도망의 시간을 벌어 부지런히 모래를 물어다 놓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센 조류가 몰려올 기미가 보이면 얼른 몸을 더 깊이 모래더미 밑으로 내려보낼거다.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눈만 잠깐 모래 위로 내밀어 둔 채. 여차하면 머리까지 아주 깊이 묻어버릴 것이다.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무엇도 닿지 못하도록. 

 

 

 

 

 

 

 

 

함보르 | 2020.05.30 10:04 | PERMALINK | EDIT/DEL | REPLY
호고곡 엊그제 뉴요커 장어 특집을 읽으면서 인간이 장어에 대해 모르는 게 많규나.. 하고 생각했는데 장어 얘기를 여기서도 보다니! 장어 팬이 된 정어니를 위해 공유 뾰롱 ✩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0/05/25/where-do-eels-come-from
남태평양 | 2020.06.06 00:05 신고 | PERMALINK | EDIT/DEL
한벼리 고마워... 단비같은 링크였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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