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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메일함'에 해당되는 글 1건
2019. 10. 30. 15:06

 

 요즘 내 안부를 가장 걱정해주는 건 스팸메일함이다. 날이 부쩍 춥다싶더니 기가 막히게 스팸메일함 제목들도 변한다. 오늘 아침 스팸은 "건강 꼭 챙기세요. 꼭이요", 그리고 "오늘의 명화입니다". 오늘의 명화는 고도원의 아침편지같은 신규 서비스인줄 알고 클릭했다. 며칠 전엔 심지어 “오랜만에 메일을 씁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을 받기도 했다. 노래 제목인줄...누가 가을 아니랄까봐.

 보내는 사람들의 이름중엔 더러 아는 사람들도 섞여 있다. 받침이 많지 않고 부드럽게 발음되는 요즘 스타일 이름들이다. 한때 스팸의 대명사였던 김하나인지 김미진인지 여하튼 팀장님이 보이지 않은지 한참이다. 제목도 이름도 모두 있음직한 것들이라 헷갈린다. 최근엔 아예 메일 제목에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내는 경우도 많다. "박OO 김XX 한AA" 이런 식. 먼 옛날 동창의 이름같기도 하고, 한때 친했지만 지금은 멀어져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애달픈 친구같기도 하다. 어쩌면 이 메일 안에 오랜만의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잠깐 머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오랜만에 메일을 씁니다”에 마음이 붙들려 혹시나...? 하고 클릭했다가 역시나만 잔뜩 보고 말았다. 오랜만에 썼다는 메일 속에는 성기능을 향상시켜주고 흥분시켜준다는 각종 약들의 이름이 빨갛고 파란 볼드체로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목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를 보는 순간엔 그래 누가 내게 사과를 한다는걸까, 하고 클릭했다가 엄청난 스트레스 개선제를 사라는 광고문구를 맞닥트렸다. 한알만 먹어도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준단다. 스팸은 딱 세가지다. 갑작스런 돈, 성적 에너지, 그리고 무한한 건강과 휴식. 하고싶거나 벌고싶거나 쉬고싶거나 모두 다에 해당되거나. 그러고보니 한때 자주 오던 사행성 게임 메일들은 요즘 꽤나 뜸해졌다. 다들 요행을 바랄 기운조차 남지 않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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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팸을 보낸 사람들의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다 답장하기를 클릭한 적이 있다. 평범한 이름에 주소도 그 이름의 이니셜을 따 만든 주소였다. 아주 쉬운 작명법, 나도 그런 메일주소가 있다. 이름 뒤에 붙은 숫자는 99였다. 9월 9일 혹은 99년을 뜻하는걸까. 'OO이맘'이라는 보낸이는 아예 대놓고 자신의 주민번호 앞자리가 주소인 것 같았다. 8509**... 'OO이맘'은 지역카페에서나 쓸법한 닉네임. 모두들 한메일 계정이다.

 이후 가끔씩 보낸이를 클릭해 메일주소를 확인했다. 그런 주소들은 자주 발견됐다. 사람들은 스팸을 위한 부계정을 개설하면서도 무의식중에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남겨두는 실수를 하는 모양이었다. 실수라기보단 귀찮아서 익숙한 정보를 집어넣기 때문일테지만. 내가 스팸메일 알바를 한다해도 내 생일이나 이니셜 혹은 좋아하는 숫자를 넣어 계정을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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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나는 매일 아침 메일함을 연다. 위에서 아래로 제목을 훑으며 잠깐이나마 낯모르는 타인들이 날린 서정을 감상한다. 가끔은 하나하나 메일을 클릭해 내용을 읽어본다. 제목에서 빛나던 서정과는 대비되지만 그래서 더 아득해진다. 붉고 푸른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스팸은 사라지고 거기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길에서 스쳐가고 버스 옆자리에서 손잡이를 잡고 선 모습이. 스팸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일부를 거기 남겨둔 사람들이. 모두가 원하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램프를 잃어버린 지니처럼 맴돌며 귓가에 속삭이는 사람들이. 언젠가 정말 못견디게 좋은 제목이 배달되는 날엔 오늘 진짜 제목 좋았어요, 하고 답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시인들은 요즘 스팸메일함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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