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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에 해당되는 글 3건
2024. 1. 29. 18:20

# 수유리 우동

 연말 건강검진에서 주렁주렁 나온 이상소견들을 위해 병원을 한 군데씩 다니는 중.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늦은 오후까지 공복이었더니, 병원에서 나오자 세상이 핑 돌았다. 마침 가까이에 시장이 있어 찾아 들어간 수유리 우동. 김밥천국만한 크기에 사람이 꽉 차있고 배민 콜도 정신없이 들어오는 와중에 사장님이 놀랍도록 손님을 잘 챙긴다. 첫째가 군대 갔다면서요? 아니 그 애기가 언제 군대를 갔대... 다른 손님이 데리고 온 아이 둘에겐, 원래 쫄면 못 먹지 않았냐며 많이 컸다고 틈새 감탄. 적당히 다정한 참견을 지켜보며 바빠도 다정하고 유능한 사람을 지켜보는 개운함을 느꼈다. 바빠서 거칠다, 불친절하다, 이런 건 핑계다. 그냥 원래 불친절하고 커뮤니케이션에 무능한 사람일 뿐. 아니, 그런데 배가 너무 고프면 때론 만사가 힘들어지긴 하는데... 

 

# 산책

 배고프지 않게 우동 한 그릇을 다 먹고 아현시장에서부터 광화문까지 걸었다. 신경종이 있는 발이 거슬렸지만 오랜만에 배가 부르고, 공기도 나쁘지 않고, 아주 춥지도 않아 적당했다. 가구 골목에선 가구점에도 들르고 (구)게스트가 출마를 위해 현수막을 크게 걸어둔 앞에선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벙커원을 지나고 무너질 것 같은 아파트를 지나고 철길 떡볶이를 지나는데 길에 구경할 곳들이 많아 발이 아픈 것도 잊었다. 골든브릿지증권 앞을 지나는데 10여년 전 연대활동..을 위해 방문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그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했다. 나는 10년 전에 믿던 것들을 이제 거의 믿지 않게 되었는데, 

 

# 켄 로치

 믿는 사람의 표본인 켄 로치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겨우 들어간 영화관. 불이 꺼지자 고개가 같이 떨어졌다. 통잠을 자본 게 언제였더라. 잠깐 졸았다. 두 시간 가까운 꽤 긴 러닝타임, 드라마틱함 없는 예상 가능한 전개, 다소 밋밋한 인물들, 웅변톤의 대사. 그 모든 단점들을 극복하게 하는 주인공의 촌스럽고 우직한 몇 마디 때문에 결국엔 또 켄 로치에게 설득당했다.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추잡하고 악랄하겠지만, 누군가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선의를 향해서 나아간다. 지치지 않고 계속 믿는 힘을 가진 놀라운 감독. 잠깐 햇볕을 쬔 기분이었다. 

 

 

 

 

2024. 1. 13. 10:36

 2005년에도 걷던 길을 2024년에도 그대로 걸으며 나 이 길을 정말 좋아하지, 하고 곱씹을 줄은 몰랐다. 다섯시 오십분에 출근해 일을 다 마치진 못한 채로 점심 시간에 광화문엘 갔다. 성곡미술관 근처에서 친구와 점심을 먹고 장욱진 전시회를 보고, 덕수궁 앞에서부터 신문로 앞까지 잠시 혼자 걸었다. 맑고 춥고 조금 소란스러운 광화문. 카페 아모카도 스폰지하우스도 없어졌지만 그 길을 걷도 있는 순간만큼은 다른 것들을 생각할 필요 없는 혼자가 된 것 같아 홀가분하고 개운했다. 여기엔 뭐가 있었는데 없어졌고 여기엔 뭐가 있었는데 사라졌네... 혼자 길 위에서 들고 나는 것들을 셈해보며 잠시 걸었다. 택시를 타고 급히 사무실로 돌아와 못 다한 일을 저녁나절까지 했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지만 광화문에서 잠시 걷고 온 하루는, 나만 알아볼 수 있을만큼만 풍족해졌다.

다음 금요일엔 꼭 리빙을 봐야하는데 그때까지 상영하고 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 각본은 꼭 영화관에서 봐야하는데. 혼자 조바심을 내면서 다음 광화문을 기다린다. 맑고 추운 길을 혼자 걷는 상상만으로도 잠시 온 몸에 기운이 돈다.
 
 

2024. 1. 13. 10:31

 

 아이의 애착인형이 뜯어지다 못해 솜이 비져나오기 시작했다. 오래 전 베트남에서 사온 물고기 모양 인형으로, 다시 구할 수도 없어 2년 전 첫 분실 사건 때 동네 카페에서 다정한 분이 새로 만들어준 것인데. 2년 반을 하루도 빠짐없이 모든 곳에 들고 다니다보니 또 이리저리 해지고 천이 터졌다. 시어머님이 임시방편으로 덧대어주셨지만 낡은 천 가운데 새 천을 덧대자 오히려 더 비어져나왔다. 방법이 없었다. 민망한 마음은 접어두고 2년만에 동네 카페 아이디를 클릭해 연락을 드렸다. 남은 천이 있다면 좀 팔아주십사하고. 

 다정한 분은 흔쾌히 아예 보수공사를 해줄테니 인형을 택배로 보내라셨다. 아이에게 상황을 잘 설명하고 인형을 병원에 며칠간 입원시키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우체국에 달려가 락앤락 봉지에 담은 인형을 부쳤다. 호이안의 작은 수공예품점에서 너를 처음 살 때는 이런 물건이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은 거의 인형에 영혼이 깃든 느낌이다. 응급환자를 이송하는 마음으로 우체국 등기를 띄우고 일주일을 조마조마했다. 잠들기 위해 누웠다가 인형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재우고, 검은 새벽에 뛰어나와 방송을 하고, 하루종일 아이템을 정하고 조율하고 뭔가를 수습하고...집에 돌아오면 아이와 같이 인형을 기다렸다. 수술이 오래 걸리나봐. 겨울이라 아픈 환자들이 많은가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다정한 분으로부터 곧 도착할거라는 메시지가 왔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자마자 달려와 박스를 열었다. 물고기 인형이 세 마리나 들어있었다. 원래 가지고놀던 크기의 인형이 두 마리, 그리고 손바닥만한 새끼 물고기 인형 한 마리. 세 마리 가운데는 직접 그리고 글을 써 실로 묶은 동화책이 놓여있었다. 물고기 인형을 정말 좋아하던 한 아이가 놀다가 그만 인형을 놓쳐버리고, 인형은 물고기로 변해 바다로 가서 멋진 친구를 만나 아기 물고기까지 낳고 가족이 되어 다시 아이에게로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주황색 실로 꽁꽁 묶어 제본한 도화지 책을 읽다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매일 보는 사람들의 악의에 지치기도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어 다시 살아가기도 한다. 지치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소생시키는 것도 사람이다. 아무리 초연한 척, 상관없는 척 해봐도 역시 사람이 힘들고 사람 덕분에 덜 힘들어진다. 해지고 닳은 물고기 인형 한 마리를 보냈다가 가족 물고기를 선물받은 아이는 손이 모자라도록 인형을 들고 다닌다. 잃어버리면 어쩌나, 지켜보는 마음이 조마조마할 때도 있지만 걱정부터 하지는 않으려 한다. 어떤 순간이든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은 꼭 나타난다. 나쁜 것은 얼른 잊고 좋은 것들을 더 오래 바라보는 한 해가 되어야겠다. 곱게 봉재된 인형 세 마리를 손에 들고 새해 첫 머리에서 혼자 해본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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