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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4. 9. 09:57

 

청탁이 들어와 이번 주 급히 쓴 원고.

 

<계산병 고치기>

“우리 이젠 더 이상 이러지 말자” 대로변 한가운데서 친구와 아웅다웅했다. 한 손에는 각자의 지갑을 꼭 쥔 채였다. 어깨를 밀치고 때론 팔을 억지로 끌어내리기도 하며 상대를 향해 뭔가를 호소하는 두 여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금전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딱 좋은 풍경이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일종의 금전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친구와 나에겐 계산병이 있다. 뭐라도 먹거나 마시면 꼭 자신이 먼저 계산하겠다고 나서는 습관이다. 같은 대학, 같은 직장을 다니며 15년도 넘게 알아온 사이라 먹고 마신 밥과 커피가 수두룩한데도 그렇다. 그날도 계산대 앞에서 한창 실랑이한 끝에 이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을 하고서야 헤어졌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첫 취업을 하면서? 아니, 생각해보면 용돈 받아 생활하던 대학생 시절에도 곧잘 계산을 하고 다녔다. 형편이 빤한 대학생들이니 각자 내도 될텐데 꼭 사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했다. 이 습관이 극에 달했을 때는 회사 근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 테이블의 밥값까지 먼저 내고 도망치듯 나오기도 했다. “제가 먼저 계산했어요!” 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나를 바라보던 선배의 황망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참 지난 후에야 들었다. 자신이 대접하려 했을 수도 있고, 동석했던 일행이 계산하려던 자리였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한 식당에 있었다는 이유로 밥값을 먼저 내버린 것이다. 선배 입장에서 따져보면 난데없이, 강제로, 계산당한 셈이다. 

 습관을 고쳐보자고 마음먹은 건 그래서였다. 마음 편하자고 먼저 계산하고 다녔지만 배려 없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때에 따라선 무시당하는 것처럼 느낄 가능성도 있었다. 한 편으론 호의를 호의로 잘 받아들이고 싶기도 했다. 마침 코로나로 사람들과 약속이 줄어들면서 계산할 일이 드물어졌다. 오랜 계산병을 고칠 기회였다. 가끔 누군가 밥이나 커피를 사준다고 나서면 카운터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다음을 기약했다. 몇 번 하다보니 생각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얻어먹어서 그런지 때론 더 홀가분하고 즐겁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의 사건이 터졌다. 

 지인 가족이 집으로 놀러온 자리였다. 코로나로 오래 만나지 못했던 터라 밀린 안부를 쏟아내고 저녁까지 챙겨 먹은 뒤 파하려는데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계산해야지! 집에서 먹었으니 계산은 할 수 없고 뭔가 들려 보내기라도 해야 했다. 나도 모르게 부엌 찬장을 열어젖히고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걸 내밀었다. “이거라도 가져가!” 

 왁자지껄한 소란이 잦아든 뒤,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혹시...얼마짜리인지 알아?”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날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온 지인 가족에게 들려 보낸 건 고급 양주, 그것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밸런타인 30년 산이었다. 심지어 내가 사둔 양주도 아니었다. 남편이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생기면 쓰려고 고이 아껴두었던 것인데...

 결국 계산하는 습관을 고치는 덴 장렬히 실패했다. 계산병이 있는 친구를 만나면 여전히 카운터 앞에서 서로 밀쳐댄다. 단돈 천 원짜리 커피라도 자신이 사게 해달라고, 저번에 네가 사지 않았냐고. 계산 싸움에서 진 쪽은 황급히 가방을 뒤져 뭔가 줄 게 없나 찾는다. 

 뒤늦게 내가 강제로 들려 보낸 양주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칠순을 맞은 지인의 어머님 잔칫날에 비장의 무기로 상에 올랐다고 했다. 다소 미적지근하던 잔치 분위기가 밸런타인 30년 산이 등장하자 후끈 달아오르며 어른들이 만면에 미소를 띠셨단다. 뿌듯한 후일담이었다. 어느 잔치 자리를 즐겁게 했다니 그보다 더 즐거운 실패가 있을까.  

 오늘도 호시탐탐 계산대로 향할 기회만을 엿본다. 어쩌면, 계산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 아무래도 내 오랜 계산병은 앞으로도 고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고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