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177)
A (177)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22. 3. 28. 12:47

 

"누가 제일 잘생겼어요??"

 예상했던 바로 그 질문이었다. 특강 시작과 동시에 잠들었던 학생이 갑자기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휘장같은 머리칼을 걷고 처음으로 마주하는 눈빛에 고등학생다운 총기가 빛났다. 맨 앞자리에서 공책을 펴놓고 필기를 하는 건지 그림을 그리는 건지 내내 펜을 들고 있던 학생이 비로소 펜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도 역시나 처음 마주했다. 역시나 십대에게서 볼 수 있는 윤기나는 눈동자.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의 집중력이 순간 최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이 순간이었다. 방송이었다면 트레몰로를 배경음으로 깔아달라고 했을텐데.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음... 하고 잠깐 지금까지 만난 연예인들을 떠올려보는 척 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고등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남자 연예인으로. 

 고심한 것 같은 표정으로 한 연예인의 이름을 말했다. 여기저기서 꺄악과 으악이 뒤섞인 기쁨과 탄성이 터진다. 방금 들었어? 분명히 같이 들었는데도 옆 친구 어깨를 치며 한번 더 확인한다. 역시!! 하며 박수를 치기도 한다. 교실에 두둥실 차올랐던 흥분이 가라앉고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더 질문하실 것 있으신 분? 문장의 물음표가 끝나기도 전에 학생들이 이미 박수를 치며 짐을 챙긴다. 얼른 파하자는 의사 표시다. 심지어 학생들은 저녁도 거르고 저녁 여덟 시까지 앉아있은 터였다. 궁금한 것은 물었고 원하는 답을 들었다(그 날 나온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나도 주섬주섬 짐을 챙긴다. 가방을 메고 나가던 학생들이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하고 인사를 해준다. 라디오에 대한 이야기가 재밌었을까? 아니면 마지막 연예인의 이름이 만족스러웠을까. 어느 쪽이든 저녁도 거른 고등학생 스무 명의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았다면 다행인 일이다. 

 강의 주제는 미디어 업계에 관한 것이었다. 짧지만 신문 기자, 티비 피디를 경험하고 라디오 피디로 일을 하는 내게 거쳐온 직업들과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란 부탁이었다. 경험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니 쉬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준비가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십대 중후반인 아이들에게 라디오는, 영유아 대상의 교재에 등장하는 전화기나 라디오의 이미지가 거의 전부일 게 분명했다. "혹시 라디오 들어보신 분 계세요?" "장성규요..." 다행히 학생 하나가 출근 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 이름을 댄다.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을 부여잡듯 잡아채 말을 이어갔다. 우리 라디오엔 나름 이런 프로그램들이 있어요. 32년째 한 디제이가 진행을 하고 있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도 있고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양희은 서경석의 여성시대'도 있고요... 설명하는데 왠지 어색하다. 프로그램을,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로 설명해야 한다니.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를 켰다. 나 역시 운전을 할 때만 라디오를 듣는다. 아까 만났던 아이들도 성인이 되고 운전을 하게 되면 라디오 청취자가 될까. 그 땐 자율주행기술이 더 발달해 있지 않을까. 괜히 주눅이 들었다. 명색이 매스 미디어인데,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매스 미디어라니 뭔가 어색한 일이다. 어쩌면 라디오는 더 이상 매스 미디어가 아닌지도 모른다. 10대와 20대라는 특정 연령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10대가 성인이 되고 20대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라디오의 위치는 또 어디쯤에 가 있을까. 날로 줄어드는 청취율 그래프를 부여잡고 라디오 제작자들은 또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새로운 플랫폼들과 콘텐츠들의 등장을 바라보고 있을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내 또래의 사람들을 만났다.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가 그 날 처음으로 서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반가워했다. "아, 저도 옛날에 많이 들었는데!" "저는 사연도 보내서 선물도 받고..."   

-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게 특권인 줄도 몰랐다. 직업과 직장을 밝히면 모두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심지어 그 중의 일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던 때도 있었다. 불과 십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나를 소개하기 위해 직업을 밝히면 많은 사람들은 아, 나도 한때는... 하고 회상하는 눈빛에 잠긴다. 한때는 매일 문자를 보내고 두 시간씩 목소리를 듣기도 했는데요. 저도 한때는...그들의 한때는 대부분 십여년 전에 머물러 있다. 청춘의 시절에 라디오를 들으며 연애와 취업을 고민했지만 이제는 삶을 살아가느라, 더 이상 라디오에게 내어줄 시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만 해도 아이 둘을 재우고 나면 열시 반, 뭔가를 보거나 듣고 싶을 때  라디오를 찾지는 않는다. 밀려있는 넷플릭스 에피소드와 쌓아만 두고 펼치지 못한 책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가로도 문화생활로도 라디오는 이제 후순위에 있다. 

 요즘은 모두의 구남친 구여친이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