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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20. 11:18

 

 시공간이 멈췄다. 일이 벌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2-3초정도 되었을까. 오른쪽에 앉아있던 승객이 비명을 지르고 지나가던 승무원이 놀라 복도에서 멈춰섰다. 비명의 끝음이 잦아들기도 전에 아이가 마무리 데코레이션을 하듯 구불구불 세팅된 머리카락 위로 남은 요거트를 흩뿌렸다. 두뇌는 충격으로 잠깐 정지했지만 손과 조음기관은 이미 움직이는 중이었다. 손이 물티슈를 꺼내들어 옆자리 승객의 머리카락을 닦아내는 동안 입에서는 쉴새없이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하는 말이 줄줄 흘러나왔다. 

 머리가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나니 사태가 파악되었다. 처음에 인지한 것 보다 훨씬 심각했다. 공들여 세팅한 긴 웨이브머리의 귀밑부터 끝부분까지 흰색 요거트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팔목 부분에서 곱게 두 번 접힌 흰색 린넨 셔츠, 생생하게 각이 잡힌 검은 정장 바지에도 모두 요거트가 묻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큐 싸인을 주기라도 한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공들여 빠진 데 없이 고루 뿌렸다. 내가 나도 모르게 큐를 줬나? 여하튼 대형 사고였다. 뿌린 건 둘째 아이였지만 원인 제공과 수습 책임은 모두 내게 있었다. 이륙하면서 귀가 아파 울까봐 파우치 요거트를 쥐어준 건 나였다. 물이나 줄걸. 아니 애초에 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비행기를 타지 말 걸. 후회하자면 끝이 없었지만 길게 곱씹을 겨를이 없었다. 비행기 안이 고요했다. 둘째 아이만 빼고. 파우치 안의 요거트를 모두 흩뿌려놓고 먹을 게 없자 화가 나는지 허리를 뒤로 꺾으며 울부짖는 중이었다. 왼편에 앉은 첫째 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창 밖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머리 끝에 알알이 맺힌 요거트 방울부터 흰색 린넨에 남은 비릿한 흔적을 닦는 사이 비행기는 청주즈음 날아온 것 같았다. 아직 닦을 곳이 한참 남았는데 그냥 내려버리고 싶었다. 혼자 청주공항에 내려서 바람도 쐬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기는 택시도 아니고 한 팔에는 낮잠시간을 넘겨 컨디션이 나빠진 13개월 아기가 허리를 꺾으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왼편에는 모친과 늘 한몸인듯 붙어 사는 네 살짜리 아이가 앉아 있었다. 왼팔로 아이를 둥가둥가하며 오른손으로 셔츠와 바지의 얼룩을 지웠다. 입에서는 쉴새없이 무언가 사죄의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 중요한 자리 가시는 건 아니신지요... 죄송합니다... 가슴 부분은 제가 닦을 수가 없어서 남겨뒀어요... 여기 계좌번호도 좀 적어주세요... 옆자리 승객은 요거트 테러를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쉴새없는 아기의 비명까지 가장 잘 들리는 자리에서 감내해야 했다. 앞자리에선가 중년 남성이 흘깃 돌아보며 눈빛을 주었다. 한 번 울부짖기 시작한 아이는 당장 내리고 싶다는 의사를 발길질로 표현했다. 나도 내리고 싶어 그런데 여기는 아직 만 피트 상공... 아이의 귓가에 단호하게 속삭였지만 원하는 답이 아니었는지 짜증만 거세어졌다. 왼편의 첫째만 없다면 안고 복도를 왕복하기라도 했을텐데 급변하는 사태에 불안감을 느낀 첫째 역시 내 바짓자락을 붙들고 눈알만 쉴새없이 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김포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방송이 나오고도 비행기는 십여분을 더 날았다. 기내는 썩 건조하고 추웠지만 땀이 줄줄 흘렀다. 입술만 달싹이며 초조하게 창 밖을 바라봤다. 김포에 랜딩하고 휴대폰을 켤 수 있게 되자마자 옆자리 승객이 내리기 전에 송금부터 해야했다. 내리시기 전에 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죄송합니다 이상의 강렬하고 번뜩이는 사죄의 단어는 없을까? 시인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단어로 뭐라고 사과했을까? 이상한 상상으로 치닫으며 발버둥치는 사이 비행기의 바퀴가 쇳소리를 내며 멈췄다. 착륙 굉음에 놀란 아이는 놀랐는지 비명을 지르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13개월 아이의 검고 윤기나는 두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커다란 소리에 겁에 질려 있었다. 

 한 비행기에 탄 승객들이 모두 짐을 챙겨 내릴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아이 둘을 양 팔에 데리고 느릿느릿 비행기의 좁은 복도를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뒤에 줄줄이 서 있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의 길도 가로막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원래 대략 그런 성향의 사람이었다. 누구의 길도 가로막고 싶지 않고, 모르는 이에게 빚지고 싶지도 않고, 아는 이에게는 더욱 더 빚지고 싶지 않은.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정반대의 유형이 되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 가운데를 막게 되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기분을 느낀다. 내가 아주 잘못 키워서라기보다는, 그냥 어린 인간을 키우는 일 자체가 일정 부분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아무런 민폐도 끼치지 않고 키워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겨진다. 말도 못하고 자신의 몸도 통제하지 못하는 작은 생명체는 의지와 욕구만큼은 성인과 똑같다. 여기저기를 쑤시고 들치고 치받으며 쉴새없이 영역을 넘나든다. 

 어렵게 어렵게 캐리어를 찾아 두 아이를 데리고 김포를 나서니 그제서야 아이들이 잠에 들었다. 땀을 흘리며 곤히 자는 아기의 숨소리를 들으며 평소 싫어하던 공차에서 밀크티를 사서 벌컥벌컥 마셨다. 좋아하지 않는 음료를 마셨지만 싫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니 호불호가 작동할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김해에서 김포까지 한 시간여를 날아오는동안 가슴 즈음에 있던 마음이 발 밑으로 훅 꺼져버렸음이 느껴졌다. 떨어진 마음을 주섬주섬 주워 올리는데 한없이 늘어지고 무거웠다. 한참 주워 담았는데도 어딘가 약간 모자란 모양이 되었다. 37-A자리, 한시간동안 사투를 벌였던 자리에 나머지 조각들이 고여 있을까. 무겁고 낮아진 채로 자꾸 가라앉으며. 긴 머리를 예쁘게 세팅했던 옆자리 승객은 어디로 가는 길이었을까. 중요한 날이었으면 어떡하나. 사과가 부족하다 느꼈을까. 십만원은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을까.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몰상식한 엄마들 중 하나라고 여기진 않았을까. 상상하면 더 괴로웠지만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의지대로 흘러갈 수 있다고 여겼던 날들은 꿈이 되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아니 정반대로 흘러간다. 새침하게 살기가 어려워졌다. 앞으로 또 어떤 말들로 사죄를 하게 될까. 알지도 못하는 사이 생면부지 타인의 길을 막고 서 있게 될까. 무엇도 확실하지 않아진 건 덤이다. 직장이나 직업같은 것, 나 개인이 좋아하는 작은 이야기들, 내면의 목소리, 사실 이런 것들이 그간 너무 비대해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한마디로- 내 맘과 상관없이 남의 영역을 마구 돌아다니게 되고 동시에 개인은 무척이나 흐릿해져간다. 자아의 비중을 과감히 줄이지 않고는 쉽게 감내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내 안에서 진짜 중요한 가운데만 남기고는 거의 다 버려야만 지속 가능해진 삶. 남길 게 무엇인지 버릴 게 무엇인지 구분하는 게 삼십 대의 마지막 남은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