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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2. 17. 10:49

 

 회사에선 2년마다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바꿔준다. 나는 최신형 기기에 워낙 관심도 없고, 사진을 옮기고 자료를 백업하는 게 귀찮아서 2년 전 휴대폰 교체시기를 그냥 넘기고 아이폰7을 여지껏 쓰고 있었다. 아이폰7은 크기도 작고 한 손으로 들어도 손목에 큰 무리가 가질 않아서, 그거면 충분했다. 아기 사진을 찍을 때 좀 아쉽긴 했지만 제일 잘 나오는 사진들은 필름카메라로 찍힌 것들이니 어차피 큰 미련은 없었다.

 그래도 4년을 넘게 쓰니 배터리가 빨리 닳고 혼자 꺼지기도 해서 이번 교체 시기엔 바꿔야겠다고 맘을 먹었다. 맘을 먹자마자 기계 녀석이 알아차리고 빈정이 상했는지 4년을 버티던 아이폰7이 음식점 테이블에서 떨어져 고장이 단단히 났다. 액정 깨지는 정도야 늘상 있는 일이라 익숙했지만 전화통화가 아예 안 됐다.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새 휴대폰으로 12미니를 신청하는데 회사에 물량을 대주는 업체에선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던 공기계를 수소문해 아이폰6를 쓰기 시작했다. 12가 출시된 시대에 절반으로 다운그레이드 된 셈이다.

 어차피 임시로 잠깐 쓸 기계니, 쓰던 앱들을 옮기지 않고 카카오톡만 깔았다. 인스타, 페이스북, 트위터, 블라인드, 요즘 주변에서 난리가 난 클럽하우스는 당연히 없다(클럽하우스를 깔기 위해선 IOS업데이트를 엄청나게 해야한다). 어쩌다보니 반강제로 디지털 디톡스를 하게 됐다. 전화 기능이 사라진 아이폰7는 집에서 가끔 와이파이에 연결해 하루에 한 번 정도 인스타그램을 확인한다. 이마저도 흥미삼아 둘러본다기보단 놓친 업무 연관 소식(?)들을 체크하는 용이다. 후다닥 좋아요 폭탄을 투척하고는 꺼버린다. 몇몇 페북 헤비유저들의 글을 보기 위해 팔로우하던 페이스북도 강제로 끊긴 지 2주가 되었다. 코로나19, 정치, 검찰, 부동산, 세상 돌아가는 꼴에 대한 각종 견해들이 뚝 끊겼다. 은근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던 트위터도 마찬가지. 트위터를 끊으니 어떤 불평불만이 있는지를 조금 덜 알게 된다. 

 한편으로 초조하기도 하다. 클럽하우스는 초대장만 받아놓고 묵히는 와중에 일에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나도 뛰어들어서 한 마디 거들어야 하는데, 안그래도 체질 아닌 인싸 커뮤니티엔 영영 못 끼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런데 그냥 이대로가 편하다. 자기 전에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으며 사십년 전 일하며 글 쓰던 어떤 여성의 고민을 접하고, 그러다가도 영 할 게 없으면 저녁 열시 반에 잠에 들어버린다. 그러고는 아침 일고여덟 시까지 아주 내리 잔다. 

 미래는 언제나 두려운 존재다. 지금 밀려오는 파도에 얼른 몸을 실어 놓아야, 이 파도가 나를 그럴싸한 미래로 데려다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파도가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밀려오는데 어떤 파도가 진짜 저 쪽으로 넘어갈 파도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모든 파도에 한 번씩은 다 몸을 맡겨볼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주식이 대세가 되면 주식도 해봐야 하고, 어떤 SNS가 대세가 되면 얼른 가입해서 한 마디라도 거들 수 있어야 하고. 어디서 어떤 가능성, 정확히는 미래의 방향을 알려줄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 도무지 모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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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계속 엉거주춤 반 걸음 뒤쳐진 채로 이 모든 파도 곁에서 발가락만 담그고 있을 것 같다. 모든 파도에 몸을 실어볼만큼 에너지가 많지도 않을 뿐더러, 갈수록 관조적으로 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낀다. 반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그냥 관찰하고 구경하면서.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해변가엔 아무도 남아 있질 않고 우두커니 나 혼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파도를 타고 저 다음 곳으로 넘어가서, 인기척도 느낄 수 없는 지경이 될지도. 아주 나쁠 것 같지만은 않다. 혼자 남은 해변가에서 아홉 시간 넘게 잠을 자고 읽을 만한 책을 한 권 찾아서 읽을 수만 있다면. 마음만 언제나 평화로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