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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30. 12:43

 

 

 이를 뽑아야겠다는 충동이 들 줄은 몰랐다. 언젠가 뽑아야 할 사랑니긴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복직이 며칠 남았는지 세어보고 오늘은 뭘 해야 할지 생각한다. 임신-육아를 거치다보니 입던 옷만 돌려입게돼서 옷도 한번 정리해야하고, 읽지 않은 책도 정리해야 하고, 회사에 들고 갈 다이어리(생전 안 썼으면서 이번엔 왜 이렇게 다이어리가 필요한 것처럼 느껴질까...기억력 감퇴를 본능적으로 아는걸까)며 사무용품도 챙겨야 할 것 같다. 2년 전 크리스마스 즈음, 출판사에서 선물로 받은 <전쟁과 평화> 완역본을 마지막으로 읽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어렵게 됐다. 복직 전 마지막 책은 조이스 캐럴 오츠의 <그림자 없는 남자>가 되었다. 

 사랑니를 뽑자! 결심하자마자 신촌에 있는 공장식 치과로 향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모두들 마스크 차림이었다.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볼이 퉁퉁 붓고 아이스패치를 붙인 사람들이 역시나 마스크를 끼고 밀려나왔다. 세 개 층을 동시에 쓰는 거대한 사랑니 발치 공장. 포스트잇 하나를 들고 7층으로 가세요, 9층으로 가세요, 안내에 따라 왔다갔다 하다보니 순식간에 치과 베드에 누운 자세다. 전망이 기가 막히게 좋은 건물이라 멀리 연세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무섭고 두려운 와중에 탁 트인 신촌의 정경을 보고 있자니 다시 태어나면 꼭 연세대를 다니고 싶다... 신촌 거리에서 흥청망청 젊음을 탕진해보고 싶다(이젠 탕진할 무엇이 없다)...공상이 시작된다. 필름포럼이나 아트하우스 모모도 가까우니 영화도 더 많이 볼 수 있겠지? 영화 보고 나면 혼자 커피마시는 게 최고지... zzz 공상 끝에 졸음이 오는가 싶더니 체어가 뒤로 휙 넘어가고 눈 앞을 초록색 면보가 덮은 채였다. 

 자 입 작게 벌리세요. 옳~지!. 

 뒤로 넘어가는 베드에서 어어 이제 뽑나요? 물어보려는데 입을 벌리는 순간 사랑니가 뽑혀나갔다. 마취때문에 사실 뽑힌줄도 모르고 누워있는데 일어나서 짐을 챙기라기에 뽑혀나간 줄을 알았다. 의사는 2초만에 내 자리를 떠 똑같이 입을 벌리고 있는 옆 환자에게로 갔다. 여긴 두 갭니다, 간호사의 말이 들리는가 했는데 의사는 또 그 옆자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주섬주섬 정신을 차려 드는데 사랑니 두 개를 동시에 뽑은 옆 환자도 당황한 채 일어나는 중이었다. 

 여기 사랑니 한번 보세요. 뿌리까지 잘 나왔어요.

 간호사가 눈 앞에 새끼손톱만한 물체를 들이밀었다. 작은 본체에 꽤 깊어보이는 뿌리가 두 가닥. 안경도 렌즈도 끼지 않아 뿌연 눈으로 인상을 써 자세히 보려는데 휙 가져가버렸다. 혹시 저 가져가도 되나요?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미 저 멀리 사라져가신 뒤였다. 잠깐이나마 마주친 내 사랑니는 뿌리가 꽤나 깊고 튼튼하게 죽죽 뻗어있어 꽤 강인해보였다. 맞물릴만한 다른 이가 없어서 한번도 그 강인함을 사용해본 적은 없었을테지만. 

 입 안에 거대한 탈지면을 왕창 밀어넣고 퉁퉁 불은 채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자 비슷한 환자들이 가득했다.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어 사람이 가득한데도 아주 고요했다. 수납대에서 손에 브로셔를 한 장 쥐어주는데 브로셔 내용이 엄청났다. 사랑니 발치로 세계 기네스에 도전한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뽑은 사랑니를 합하면 63빌딩보다 높다며 CG로 사랑니탑을 만들어놓은 데선 입이 딱 벌어졌다(말이 그렇고 퉁퉁 부어있어 벌리진 못했다). 한 쪽 손으론 볼을 어루만지며 수납대에서 줄지어 계산을 끝내고 1층의 치과로 줄지어 들어갔다. 착하고 질서정연하게 진료실과 수납실, 치과를 오르내리던 환자 무리엔 왠지 모를 착한 질서정연함과 차분함이 감돌았다. 꽤 높은 비중으로 무기력함도 섞여 있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라고. 슬프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얼마 전 엄마도 생니를 뺄 일이 있었다. 아프거나 슬픈 건 아닌데 운전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주루룩, 흐르더라고 하셨다. 몇 달 후 있을 임플란트 시술을 위해 미리 이를 뺀 것이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요즘 엄마의 미소는 비어있다. 그 빈 자리를 보면 나까지 더불어 의기소침해지고 추워진다. 발치가 인간의 본능적인 전투력을 떨어트리기 때문일까. 이를 뽑는다는 건, 공격하고 이길 가능성을 줄이는 행위다. 비록 진화하며 필요없어진 여분이라 할지라도, 어금니는 우리 몸에서는 전투력을 담당하는 최전선이다. 씹어 삼켜 소화시키며 세상을 만나는 최초의 관문이자,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 서른 개 남짓한 마지막 맷돌이자 도끼. 내게는 이제 여분의 이가 남아있지 않다.  

 몇 시간이 지난 후 피투성이 거즈를 빼고 입 안을 한참 들여다봤다. 확실히 비어있었다. 있을 땐 있는 줄 몰랐는데 빠져버리니 정확히 빈틈이 느껴졌다. 진통제를 먹고 누웠는데도 이상하게 몸살기운이 돌았다. 사랑니 하나의 분량만큼 전투력이 줄어서일까. 허전해서 자꾸만 혀끝으로 그 부분을 더듬어본다. 움푹 파인 빈자리가 징그럽다. 그게 뭐가 됐든,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감각은 언제나 생생하다.

 2초만에 빠져나간 내 사랑니도 지금쯤 기네스에 도전하는 바벨탑의 일부가 되어 있을까. 괴랄하긴 해도 그렇다면 좀 덜 섭섭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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