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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7. 19. 01:31

 
 감정이 둔탁해졌다. 기분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처음엔 좀 헷갈렸다. 매일 생방송을 하고 퇴근해서 두 친구들을 돌보고, 또 일어나서 생방송을 하러 나가고 또 퇴근해서 친구들을 돌보는 루틴한 일상 덕분에 잡념이 줄어든 줄로만 알았다. 아이들은 자주 아프고 또 자잘한 문제들이 늘 생겨서, 고민하고 해결하고 돌아서서 큐시트를 짜다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정말로 없기도 했다. 기분이 어떤지 무얼 느끼며 사는지 복기할 물리적 시간이 없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들을 제외한 곁가지를 잘라내보고 싶었다. 올해 나는 매일 이렇게 살았다. 6시 20분에 일어나서 묵상하고 스트레칭하고 방송사고 외엔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NPR 디스모닝을 듣고 일곱시엔 씻는다. 아침을 먹고 7시 40분엔 아이들을 깨워 등원 준비를 한다. 우당탕탕 멱살잡이 등원을 마치고 지하 카페에서 디카페인 아이스 라테를 테이크아웃해서 사무실에 앉으면 9시 40분 언저리. 10시가 업무 시작 시간이니 가끔은 책을 한두꼭지 보기도 하고(유지혜 작가의 책을 처음 이렇게 읽었다) 오터레터를 읽기도 한다. 10시부터는 원고를 보고 수정할 부분을 찾고 선곡, 섭외, 그 날 방송에 관한 각종 자질구레한 것들을 정리하고 점심을 먹는다. 일주일에 한 번은 동기와 약간은 어설픈 공부를 하고 나머지 요일엔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 점심이 빈 날엔 멀리 걸어 카페에 가거나 아주 짧은 운동을 한다. 녹음과 생방송을 연이어 마친다. 회의를 한다. 이모님과 바톤터치를 하고 저녁 시간 돌봄을 시작한다. 11시 언저리에 자는 줄도 모르고 잠에 들었다가 새벽에 몇 번의 호출을 받고 깨어난다. 다시 6시 20분이 되면 알람이 울리고 성경을 몇 장 읽은 다음 디스모닝을 틀어두고 스트레칭을 한다.... 온에어가 들어오면 생방송을 한다... 회의를 한다... 섭외를 한다... 새로운 한글파일을 열고 그 날의 날짜를 넣은 다음 빈 칸을 이문세, 임영웅, 아이유로 채운다... (200번의 반복). 
 읽기는 했으나 쓰기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고 써서 뭘 하겠나. 저널은 오프라인 10년 다이어리에 간단하게 기록해도 된다. 일상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기억에 남긴다. 목적이 있는 확실한 쓰기 외에는 쓸 필요가 없어보였다. 가끔 아, 저 장면을 쓰고 싶다... 는 욕구가 스치긴 했지만 이내 사라졌고 몇 번 무시하자 알람소리가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뚝 끊겼다. 물음표와 느낌표가 줄어든 자리엔 물결~ 물결~과 말줄임표가 들어섰다. 기분과 감정을 모호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늘었다. 사건과 장면에 대한 리액션이 줄었다. 
 그 결과 얼얼해졌다. 아주 시린 추위에 오래 나가 있었던 것처럼, 피부의 일부가 마취에서 덜 깬 것처럼. 감정의 일부가 남의 것마냥 얼얼하다(고나마 인식한다는 게 다행일까). 원래도 희노애락의 진폭이 얕았는데 불편한 치마를 입은 것처럼 감정보폭이 좁아졌다. 문제는 내가 감정을 날 것으로 느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유형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엔, 쓰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한다. 기쁠 때는 기쁘다는 세 음절을 써 넣어야 기뻐진다. 슬플 때는 슬프다고 적어야 눈물이 흐른다. 괴로울 때는 죽고싶다고 써야 입술이라도 앙다물게 된다. 쓰지 않으면 도통 상태를, 감정을, 스스로를 진단하기가 어렵다. 만사를 글로 배운 부작용이 이런 걸까. 쓰기-인식하기-느끼기로 구성된 인간. 200번의 비슷한 하루를 보낸 2023년의 중간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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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한다, 고 혼자 생각하고 털어버리려다 동아리 후배가 나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아주 오랜만에 블로그를 열었다. J야 고마워, 네 덕에 오늘은 조금 쓰고 그만큼 느낄 수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