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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4. 15. 14:01


 삼사십대 여자들이 낳은 아이들을 이십대와 육십대 여자들이 나누어 돌본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압도적인 비율로 이십대가 많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려가는 이모님들은 압도적으로 육십대다. 아이들의 주양육자인 삼사십대 여자들은 일을 나가면서 이십대 여자들에게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9시간 뒤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서 육십대 여자들에게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넨다. 다른 세대 여자들에게 아이들을 넘겨주었다 받는다.

 낳기 전에는 낳고 기르고 돌보는 일이 이렇게까지 여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줄 몰랐다. 나의 경우는 사적, 공적 도움을 총망라해 받는 편에 속한다. 그 과정에서 가족이 아닌 여러 여자들에게도 아주 많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녀들이 없다면, 한 순간에 도움들이 사라진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건 곧 아무 존재도 아니게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를 이러이러한 모양의 존재로 유지하게 도와주는 건 다른 세대의 여자들이다. 아이들은 이 품에서 저 품으로 옮겨다니며 안기고 업히고, 보드라운 손부터 검버섯 돋은 손까지 이 손 저 손으로 쓰다듬어지며 자라난다. 집을 청소하고 반찬을 만들어내는 데는 가끔 더 늙은 여자들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몇 달 전 마지막으로 집을 청소하러 온 여자는 등이 굽은 칠십대였다.

 여자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젠더 문제에 대해 얄팍하게나마 귀동냥할 기회가 있었던 대학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다. 이제는 몸으로, 생활로 느낀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고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것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어마무시하게 필요한, 여러모로 취약한 여자에 속한다는 것을. 돈을 지불하는 쪽이 나라 하더라도 이 관계는 언제까지나 호혜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돈이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관계의 정의가 수립되는 대부분의 이치는 여기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업무는 돈과 시간을 교환하는 데서 발생하지만 돌봄은 예외다. 돈과 시간을 교환하는 기본 거래 밑에 애정이 수반되야 한다는 치명적 조건이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무감하게 키울 순 없기에, 애정이 없는 돌봄은 아예 성립하질 않는다. 그러나 애정은 돈과 별개로 생겨나고 자라난다. 이 어려운 조건을, 애정어린 손길을 부탁해야 하는 쪽은 나다. 매일 아침 적어보내는 알림장 마지막 문장은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로 끝맺음한다. 앞으로도 꽤 많은 부탁합니다와 감사합니다 사이에서 오가야 할 것이다.

 오늘도 그들에게 업혀서 어그적 어그적 반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육아휴직을 하고 명목상으로는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는데도 여전히 그렇다. 그녀들의 심기를 걱정하고 건강을 염려한다. 내가 빚지는 이십대 여자들과 육십대 여자들의 마음과 몸이 튼튼하기를 늘 기도한다. 혼자서는 빚지지 않고 잘 살 수 있었다. 무자녀 기혼 여성일 때도 그랬다. 이젠,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도움은 대부분 여자들에게서 온다. 어떤 때는 발목이 무거운 것 같다가도 가끔은 이제야 알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이, 이런 모습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굴러가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