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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4. 19. 11:32

 

 아침 일찍부터 소란스럽다. 장터가 열리는 날이다. 베란다에 서서 천막 갯수를 가늠해본다. 왼쪽부터 과일, 건어물, 해물, 채소... 즉석 돈가스와 닭강정, 분식집도 자리를 펼치는 중이다. 화덕피자를 구워내는 트럭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으로 마르게리따 피자를 사와서 먹기로 첫째와 약속을 해놓은 참이다. 사야 할 식재료들도 많다. 이제 막 돌이 된 둘째도 삶은 제철 감자의 맛을 보더니 한 알을 혼자서 다 주워먹기 시작했다. 새벽 출근하는 남편은 당근 라페를 넣은 샌드위치를 좋아한다. 첫째는 블루베리나 산딸기가 보이면 놓치지 말라고 당부하고 어린이집엘 갔다. 점심으로 먹을 돈가스도 튀겨 와야 한다. 유리 그릇 하나와 에코백을 챙겨 장터로 나간다. 화요일이기 때문이다. 휴직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요일에 대한 감각이다. 

  일을 할 때는 그 날의 방송으로 요일을 가늠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은 보통 일주일 단위로 주간 코너를 가지고 있다. 월요일은 책을 소개하는 코너, 화요일은 선곡 대결이 있는 날, 수요일은 디제이가 혼자 진행하는 날, 목요일은 라이브 코너가 있는 날... 이런 식이다. 모든 요일은 방송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금요일에 생방송을 하지 않는 경우엔 주말 방송분까지 사흘치를 열심히 편집해야 하는 날. 편집기 앞에 하루종일 앉아있다 샌드위치를 사와서 먹으며 3초, 5초, 10초씩 분량을 덜어내는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일을 멈춘 지 1년쯤 지나자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월요일엔 6단지에서 장이 열리고 화요일엔 우리 단지에서, 금요일엔 5단지에서 장이 열린다. 비슷비슷하지만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다. 6단지 장터에선 즉석도넛집을 좋아한다. 명태식해를 무쳐서 만 원에 파는 가게도 있다. 국은 끓이고 단품 요리는 해봤어도 밑반찬은 영 못하는 내겐 밑반찬 파는 집이 많은 장터가 동앗줄이다. 장이 열리는 날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각 단지를 다니며 하나라도 사온다. 미역국은 내가 해서 먹을 수 있지만 오징어채나 멸치볶음은 잘 못한다. 5단지 장터엔 그 날의 국과 김치를 담궈 파는 분이 계신다. 여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텅 빈 김치냉장고를 열무김치로 채워넣어야 점심을 굶지 않을 수 있다. 

  육아휴직 1년, 시간표가 프로그램 주간 구성안에서 주간 식단으로 바뀌어간다. 먹는 일에도 방송 못지 않게, 아니 어쩌면 방송보다 훨씬 더 많은 수고가 필요하다. 방송은 재료를 잘 세팅해두면 어느 순간부터는 알아서 굴러가기도 한다. 성능 좋은 냉장고 안에 유기농 재료들을 칸칸이 잘 채워넣으면 어느 순간 요리가 완성되어 있기도 한 경우랄까. 주기적으로 냉장고가 비지 않게 재고 관리를 하고 요리의 마지막 단계에서 간에 신경을 쓰면 아주 큰 하자가 발생하진 않는다. 하지만 진짜 먹는 일엔, 단 한번의 '저절로' 도 허용되지 않는 편이다. 아무리 좋은 유기농 재료를 냉장고에 채워둔들 시간이 지나면 음식쓰레기가 될 뿐이다. 밀키트로 떼운다 하더랄도 불을 올리고 물을 끓이며 몸을 움직여야 한다. 밥을 열 번 짓는다고 해서 가면 갈수록 밥 짓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도 아니다. 한 끼를 해결하는 덴 언제나 만만치 않은, 그 날 분량의 새롭고도 놀라운 수고가 투입된다. 물론 가장 놀라운 건, 그렇게 밥을 지어 먹어도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배가 고파진다는 점이다. 

 입맛이나 먹을 수 있는 재료의 종류가 모두 다르단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 집엔 어른 두 명과 세 돌, 이제 갓 돌인 아이 두 명이 함께 살기에 조금 더 까다롭다. 앞니 몇 개로 대부분의 음식을 씹어먹는 둘째에겐 무른 음식들이 필요하다. 주로 소고기나 오징어, 야채를 함께 갈아 완자를 만들거나 데쳐서 준다. 남는 재료로는 어른들이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 소진한다. 아이 둘과 어른 둘이 먹는 일을 신경쓰는 데만 해도 일주일의 시간표가 빡빡하게 들어찬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써도 언제나 결과물은 시원치않다. 어찌저찌 장을 봐다가 무언가를 먹고 먹였다는 데서 위안을 삼는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심히 장을 보고 나면 주말이 온다. 일을 하지 않아도 금요일은 여전히 좋다. 주말이라고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쉬워지진 않지만, 묘하게 달라진 다른 흥분이 있다. 한데 모이기 어려운 네 사람이 하루종일 어울려다니며 단합대회를 하는 느낌이다. 오트밀에 우유를 부어 다 같이 아침을 먹고,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한다. 냉장고에 일주일 내 남아있던 잔반도 처리한다. 우당탕탕 모여 여섯 끼니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챙겨먹다보면 시간이 달아난다. 월요일이 다가온다고 출근할 일은 없는데도 왠지 마음이 저려온다. 뭔가 깜빡하고 처리하지 않은 일이 있는 것만 같다. 주말에 나가는 녹음방송에 광고를 제대로 넣었는지 스스로의 정밀성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 제대로 된 노래 대신 MR을 심어넣은 건 아닌지 갑자기 초조해지는 일요일 저녁. 평일의 감각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주말이 끝나는 소리는 여전히 귓전을 때리며 온 몸을 관통해온다. 그래보았자 월요일이 되면 다시 6단지 장터를 향해 에코백을 매고 갈 뿐이지만. 

  육아휴직 1년. 수입은 줄었지만 먹고 사는 일 그 자체에는 한뼘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장터에 펼쳐졌던 천막의 소란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화요일이 절반 넘게 지나갔다는 표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