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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2. 24. 12:06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공간과 시간 중 공간을 먼저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공간이 생긴다면 그 공간에 들를 시간도 어떻게든 마련되리라. 일단 상가까지만 걸어가면 두 곳 중 한 곳은 카페다(나머지 한 곳은 부동산). 게다가 나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스타벅스가 무려 세 개인 초스세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디에서도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는 사람들 천지였다. 일하고 쉬고 인터넷쇼핑을 하고 SNS를 구경하다 커피와 끼니를 해결하고...카페에선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했다. 심지어 24시간 영업하는 카페들도 있으니 여차하면 잠도 잘 수 있으리라. 카페로 나가기 시작하자 카페생활자들만 보였다. 다양다종한 이유로 하루에 한 번은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 MBTI로도 별자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도 카페생활자라는 단어로는 묶이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들은 완벽했다. 특히 스타벅스는 모든 게 가능한 소우주였다. 아침으로 간단한 샐러드를 먹고 두 시간 뒤 점심으로 파스타를 고른 뒤 디저트를 먹는다. 내킨다면 저녁으로 라자냐까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음악과 이미 거리두기형으로 배열된 책상들, 무제한 와이파이와 콘센트가 비치된 작업하기 가장 좋은 곳.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눈치 볼 필요 없는 스타벅스 특유의 분위기. 문제는 나였다. 노트북 봇짐을 지고 전전하는 주제에 따지는 게 많았다. 스스로도 좀 한심하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그런 걸. 

 일단 사람이 적어야 했다. 공공장소에 가는 주제에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게 분명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많은 스타벅스는 기피 1순위였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아기1을 어깨에 매달고 아기2를 종아리에 매단 뒤 식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편이 나았다. 어딜 가도 회사 로비 스타벅스가 연상돼 지나치게 구내식당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싫었다. 저녁 프로그램을 할 때 일주일에 세 번은 스타벅스의 샌드위치로 식사를 대신했더니 이제 사이렌의 문양만 봐도 단호박에그샌드위치의 맛이 입 안에 느껴질 정도였다. 스타벅스는 쉼이나 나만의 공간보다는, 차라리 업무와 동의어였다. 잠에서 덜 깬 채 국회의원의 인터뷰를 진행한 뒤 정신을 차리기 위해 털어넣는 카페인, 편집기 앞에 앉아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 먹는 과일도시락. 싸지도 않으면서 희한하게 퍼석퍼석한 베이커리류. 다른 부서 사람들과 간단한 회의를 하기 위해 앉는 4인용 테이블. 심지어 굿즈도 다이어리도 챙기지 않는 나는 그 좋은 스타벅스에서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어딜 가도 비슷하게 친절한 바리스타들과 표준화된 음악까지도 왠지 업무의 연장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스타벅스를 제외하자 선택지는 절반으로 줄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선 노트북을 펼치는 것체가 민폐인 경우가 많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 불편한 의자와 테이블이 대부분이었다. 카페에 많은 동그란 테이블에선, 커피는 마실 수 있지만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기엔 불안했다. 나는 도기연쇄살인자였다. 손끝이 무뎌 무언가를 잘 떨어트리고 깨트렸다. 우리 집 부엌이라면 내가 매일 무언가를 깨고 아기들아! 여기 다가오지마! 하고 다급하게 외쳐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남의 카페에서 컵을 깰 순 없었다. 라운드 테이블이 있는 카페들이 제외됐다. 

 의자는 치명적이었다. 첫번째 아기를 낳은 뒤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아 한 달여를 누워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가족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척추질환환우카페의 글을 정독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다행히 통증은 차츰 줄어들어 의자에도 앉고 회사에서 일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 켠에선 허리를 조심해! 척추질환환우카페에 돌아갈 순 없어! 건강염려증을 가진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척주기립근을 무너뜨리는 푹신한 의자는 기피 1순위였다. 딱딱한 의자라고 다 편한 건 아녔다. 철제 의자에 앉으면 고질적인 수족 냉증이 도져 손을 녹이느라 타자를 칠 수 없었다. 공립학교 스타일의 적당히 딱딱한 목재 의자가 필요했다. 의자를 따지고 다니자 남은 선택지들 중 절반이 또 줄어들었다. 

 스타벅스 안돼, 둥근 테이블 싫어, 의자 푹신하면 큰일나... 노트북을 가방에 넣은 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잠깐 내부를 둘러보고 다시 나오기를 며칠. 동네에선 도무지 적당한 책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동네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차를 몰고 가야하니 이제 주차가 가능해야 했다. 스타벅스 안돼, 둥근 테이블 싫어, 의자 푹신하면 안돼, 주차 가능해야 돼...

 노트북을 내려놓을 수 있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울까. 후보지를 몇 개 뽑아두고 동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곳씩 앉아보며 테스트에 들어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