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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 11. 11:53

 

 토토! 토토! 

 사랑하는 인형이 존재하는 곳에서 아이는 최소한의 행복을 보장받는다. 1년이 되도록 울며 들어가는 어린이집에서도, 낯선 외출 장소에서도, 엄마가 사라지는 꿈 속에서도. 양 손에 들린 물고기와 토끼는 타인과 세계가 두려워질 때 아이를 보호하는 최후의 방어막이자 최소한의 따뜻함이다. 인형의 냄새와 닳은 면의 감촉은 안정감의 상징이다. 그러니 헤어지지 않아야 한다. 네 살 인생 평생의 연인이자 친구이자 반려자가 아닌가. 인형의 분실은 사별에 준하는 사건이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한다.

 애타게 토토를 외치며 거리를 몇 번 배회한 이후 똑같은 인형을 하나 더 주문했다. 지금까지는 늘 내가 찾아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없어질 때마다 마음 졸이며 온 동네를 배회할 순 없었다. 게다가 돈 4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복제품이 없는 물고기 인형과 달리 토토는 프랑스에서 대량 생산되어 각국으로 공급되는 유명한 어린이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제2의 토토는 그렇게 택배상자에 실려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아이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상자를 열어 토토를 꺼내고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아주 잠깐 전지전능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이와 인형의 세계에서만큼은 이별을 막아내고 예비 인형을 준비하며 세계의 붕괴를 온 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 아닌가. 

 어지간해선 세탁도 삼갔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인형들을 삶아 빨래했는데, 천들이 너무 빨리 닳아 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냄새나는 인형을 더 좋아한단 이유도 있었다. 밥을 먹다 말고 입가를 인형에 부벼 자신이 먹은 것들의 흔적을 묻혀 놓고, 잠에 들면서는 여전히 침을 묻혔다. 모르는 이가 맡으면 깜짝 놀랄 냄새가 났지만 아주 가끔씩만 망에 감싸 세탁기에 넣었다. 지난 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대방어와 우럭이 난도질당하던 그 자리에 뚝 떨어져서 나를 놀라게 하기 전까지는. 

 아이가 재빨리 토토를 주워들며 빨리 주워서 괜찮아! 하고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한 번 떨어져 닿았다면 아무리 빨리 주워들어봤자 닿은 것이지만 아이가 그런 일을 납득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래 괜찮네! 제철 대방어의 피가 묻지는 않았을지 불안한 시선으로 재빨리 스캔한다. 다행히 외상을 입진 않은 것 같았다. 얼핏 냄새를 맡아보니 죽어가는 생선의 비린내가 훅 끼친다. 아이는 혹시나 엄마가 인형을 뺏아갈까봐 토끼의 손을 꼭 잡은 채다. 괜찮다,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옷장에는 토토가 또 있잖아. 나는 또 잠시 전지전능함을 느꼈다. 

 아이가 잠시 다른 데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비린내를 뒤집어쓴 인형을 세탁기에 돌리고 옷장 안에 몰래 빨래집게로 널어두었다. 2번 토토를 꺼내 침대 위, 물고기 인형 옆 자리에 뉘이고 이불을 덮었다. 느낌이 다르긴 하다. 꼬질꼬질함이라곤 없고 방금 막 태어난 아기 토끼처럼 통통하고 맑은 혈색을 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같은 토끼니 괜찮겠지. 자연스럽게 누워 있는거야 2번 토토! 초조한 마음으로 토끼 인형의 옷매무새를 한번 더 가다듬었다. 아이가 우다다다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토! 토토? 어...?"

 토토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하자,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방문을 닫으려는데 한 마디를 남긴다. "토토가 살이 쪘네에~? 뭘 먹은거지~?" 늘 조물락거리며 여기저기 들고다녀 납작해진 원래의 토토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풍성한 볼륨감. 귀도 통통하고 볼도 통통하고 배도 통통해진 토토를 이불에서 꺼내 한참을 살펴보더니 아이는 몰래 웃는다. "내가아~ 자는 동안 쌀 꺼내서 밥 해먹었구나아~?" 

-

 아이는 하룻동안 살 진 토토를 소중히 안고 다녔다.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도 인형을 높이 쳐들고 "토토가 살이 쪘어요!" 하고 외쳤다. 저녁이면 늘 이유식도 먹여주고 생일파티도 자주 열어 케익도 많이 먹여주었으니 살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2번 토토의 등장이 아이의 세계에 아무 균열도 내지 않았음에 안도하던 어느 저녁, 내 무릎에 누운 채 양치를 하던 아이가 우물거리며 무어라고 외친다. 응? 뭐라고? 돗도! 돗도가 왜 저기에? 입가에 허옇게 거품이 묻은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보니... 열린 옷장 문 사이로 며칠 전 빨래를 해둔 1번 토토가 바지 집게에 귀를 접힌 채 매달려 있었다. 세탁을 마치고 더 홀쭉해져 마치 참수형을 당한 모양으로 애처롭게. 

 "토토!!!! 토토!!!!" 십자가 밑의 막달라 마리아처럼 아이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왜 내 토토가 저기에 매달려 있지? 나는 급히 남편을 팔았다. "여기가 아빠 옷장이잖아. 아빠가 토토를 너무 좋아해서 잠깐 가져갔나봐." 아이는 아빠를 찾아가 울며 따지기 시작한다. "저건 내 돗토! 돗토라고!!!!" 아이가 따지는 사이 나는 눈알을 백 번쯤 굴리며 살진 2번 토토가 어디에 누워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아직 4살이다. 스파이더맨이 이 세계와 저 세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에 사는 것도 아니다. 토토가 두 마리... 여기 한 마리 걸려있고 저기 한 마리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면... 애써 지켜온 나의 전지전능함이 훼손될 게 분명했다. 

 아이가 자신의 아빠와 토토를 두고 담판을 짓는 동안(다시는 가져가지 마아~ 내꺼야~~)살진 2번 토토는 다시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컴컴한 어둠 속에 묻힌 채 당분간은 동면에 빠질 운명이다. 언젠가 비쩍 마른 원래의 토토가 자전거 바구니에서 떨어지는 날, 데굴데굴 굴러가 청소차의 뒷짐에 실리는 날, 금고에서 탈출해 다시 통통한 배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당장 내일이 될지 1년 후가 될지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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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 둘을 재우고 잠에 빠지기 전 다시 한 번 토토를 검색한다. 여전히 4만원이면 살 수 있는, 그 자리에서 팔리고 있다. 복제품 토토가 이토록 많음에 나는 안도한다. 언제까지 이 세계를 견고하게 지탱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나는 4만원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무너져가는 세계의 한 귀퉁이를 재빨리 메꿔줄 수 있는 나의 무기, 놀라운 물류시스템과 약간의 돈. 

 어린이는 오늘도 해맑게 1번 토토를 손에 들고 여전히 조금은 두려운 바깥 세상으로 걸어나갔다. 손에 들린 작은 천쪼가리가 자신을 지켜줄거라고 굳게 믿은 채. 그 작은 천쪼가리가 세상에 단 하나뿐이고, 유일무이한 존재하는 사랑을 간직한 채. 마음이 상하는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냄새나고 오래된 천에 얼굴을 부비고 말을 걸며 회복되고 또 회복될 것이다. 이 놀라운 회복탄력성, 자주 상하지만 금방 신선해지는 마음이야말로 어린이들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어디서고 언제고 금방 자신만의 작은 피난처를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세계를 지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