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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10. 13:34

 

 한림 근처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아주 빠르게 우리를 스캔하더니 재빨리 돌아섰다. 핑크색 행주와 파란색 유리세정제를 양 손에 든 채였다. 렌트카 번호판을 단 우리 가족의 차를 스쳐간 남자는 우리 곁을 지나 새로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차량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자가 내리고 짧게 이어지는 대화. 거절, 무안한 제스처, 웃음. 또 다음 차가 들어오고 남자가 다가갔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에게 다가가 짧은 제안, 빠른 거절, 머쓱한 인사. 남자는 장을 보는 동안 유리를 닦아주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남자를 지나쳐갔고 그을린 얼굴에 캡모자를 쓴 남자는 마트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요즘 가끔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중학교 때 다녔던 공부방 선생님이다. 댁에 가서 수학을 배웠는데 수학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고 혼불이나 태백산맥을 빌려보았던 기억만 선명하다. 당시 내가 한창 박경리의 토지를 읽고 있다고 하니 이 책들도 재밌을 거라며 권해주었는데 역시나 새벽 늦게까지 밤을 지새며 빠져들었다. 선생님 댁엔 대하소설도 많았고, 당시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책 대여점에선 볼 수 없는 단행본들도 많았다. 숏컷에 눈매가 야무졌던 선생님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50대 여자였다. 당시 대학생 정도 되는 자녀분들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십대 중반이었으니, 왜 서울대 수학과를 나왔는데 동네에서 공부방을 열었는지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20년이 지난 이제는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선생님 댁을 떠올린다. 잘 다듬어져 있던 베란다 정원, 거실에 풍족하게 꽂혀있던 대하소설, 아이 둘을 키우고 공부방을 열어 중고등학생 수학을 가르치던 서울대 출신의 중년 여성. 나도 이젠 서울대를 나와 아이 둘을 기르며 이모님 두 분을 모시고 아슬아슬 회사를 다니는 30대 후반 여성이 되었다. 삶을 단순하게 결정할 수 없게 되고보니 20년 전의 공부방 풍경이 마음에 아프게 박힌다. 시간을 넘어 돌아간다면 선생님과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물어보고 싶다. 이제는 다 잊어버린 최명희의 혼불을 찬찬히 다시 읽으며.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준엄한지, 또 일 그 자체의 의미는 내게 무엇인지 정말로 매일 곱씹는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심정으로 시간을 견뎌낸다는 걸 잊지 않으려 자주 두리번거린다. 주위를 살피다보면 가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서글픈 표정을 훔쳐보고 나면 죄책감과 동질감,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온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지금이 터널이기를, 이왕이면 밀리지 않고 빠른 속도로, 잠깐 숨을 참으면 한 번에 통과할 수 있는 터널이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