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하고 맑고 추운 11월 아침이면 늘 오래 전 걸었던 산티아고 생각이 난다. 토요일이라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청소기를 한바퀴 돌리니 아침나절이 지나간다. 한 프로그램이 또 끝났다. 막막했던 작년 11월이 아득한데 다 지나간 후에야 약간은 허탈해하며 안도감을 느낀다. 혼자였다면 어떤 출퇴근 형식이든 상관 없었겠지만 딸린 식구들이 많아지니 가볍게 움직이는 게 점점 쉽지 않아진다. 이모님들의 상병과, 아이들의 조촐한 부상과 잦은 감기와 폐렴, 끝나지 않는 의정갈등이 가정에 미치는 여파 등...모든 것들이 쉽지 않았는데 결국 도움의 손길들로 이렇게 또 한 챕터를 넘어왔다.
내가 다니는 회사의 라디오 피디들은 대체로 1년 단위로 프로그램이 바뀐다. 매일같이 짧으면 두세시간, 길면 네시간동안 보던 사람들이 바뀌고, 다루던 콘텐츠가 시사에서 팝에서 트로트에서 아이돌로 휙휙 바뀐다. 프로그램이 바뀌면 오전 5시에 출근하다 내일부턴 오후 5시에 출근하기도 한다. 생활 패턴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들이 바뀌고 내 생각도, 입에서 나오는 말의 결들도 달라진다. 1년 단위로 다른 삶을 산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꽤 많은 개편철을 지내왔다. 티는 나지 않아도 모든 피디들의 마음이 어수선할 때다. 늦은 금요일 오후 조용한 사무실에서 백여권의 책을 정리하고, 회사 책상 자리를 새 팀으로 옮긴 뒤 퇴근하는 길에 예전 내 모습들을 떠올렸다. 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마지막 날 큐시트 마지막 곡을 정성스럽게 고르고, 막방 큐시트를 사진으로도 남겨놓고, 그러고도 아쉬워서 집에 오는 길에 혼자 몰래 눈물 흘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리운가? 잠깐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립진 않다. 끝날 때의 헤어짐이 아무렇지도 않고 또 새로운 업무가 아주 두렵지는 않은, 서른 여덟살의 지금이 딱...맞춘 듯이 편안하다. 아쉬운 것도 미련이 남는 것도 없이 아주 홀가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