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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아기의 비밀'에 해당되는 글 17건
2020. 3. 14. 00:24

 

 

 아기는 요즘 이별을 연습하는 중이다. 출근준비를 마친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안넝-' 하고 나를 떠민다. 작은 손바닥을 쫙 펴서 어깨나 가슴께를 떠밀며 가버리라는 듯 밀친다. 복직 초반 며칠간은 드라이기로 머리만 말려도 옆에 와서 다리를 붙잡고 떼를 쓰더니 이제는 으레, 당연히 나가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나간다고 해서 안녕이 쉬워지진 않는다. 퇴근하고 오면 뽀뽀도 윙크도 해주지만 출근길엔 눈맞춤조차도 언감생심이다. 

 금요일 저녁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별하는 시간이다. 퇴근한 내가 옷을 갈아입고 오면 한두시간 책도 읽고 걸음마도 연습하며 놀다가 잠 잘 준비를 한다. 주로 아기가 자러 들어간 사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집을 나서시는데, 오늘은 잠깐 거실에 나온 사이 나갈 준비를 하던 할아버지와 딱 마주쳤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할아버지를 본 아기는 대번에 고개를 백팔십도 돌렸다. 쳐다보지도 않고 예의 '안넝-'. 간다는 거 알겠으니 얼른 가버리라는 걸까. 아기가 더 서운해할까 얼른 안고 방으로 들어와 책을 읽어주며 잘 분위기를 잡았다. 책도 보고 노래도 부르며 뒹구르르 하다가 아기가 혼잣말을 한다. 할미 안넝, 하라비 안넝, 언니 안넝... 안넝. 

 친척 조카가 놀러와 며칠을 함께 지냈다. 나이 차이가 열 살도 더 나니 같이 노는 건 아니었는데도 지내는 내내 언니 언니 하며 따랐다. 언니가 먹는 것, 언니가 하는 양에 관심이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언니를 찾더니 집에 간다고 나선 언니 앞에선 역시나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자 언니... 하며 그제야 울상을 지었다. 방을 맴돌며 언니 없다 하고 되새긴다. 아기에게 안녕은 곧 없음이다. 

 그 언니가 잠자리 누워 다시 떠오른 모양이었다. 한참을 혼자 할미 안넝, 하라비 안넝, 언니 안너엉 하며 천장을 향해 손을 흔드는 걸 지켜보는데 와락 눈물이 났다. 아주 옛날엔 나도 비슷한 어린이였다. 동생이 태어나기 전 대여섯살까진 집에 친구들이 왔다가 돌아가도 울었고 친척 언니들이 왔다가 돌아가도 울었다. 누군가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간다는 건 사라짐을 의미했다. 작고 좁은 세계 안엔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커다란 현관문을 통해 어디론가로 달아났다. 그 문을 통해 나가면 없어졌다. 저녁이 되면 함께 놀던 사람들이 없어지는 게 싫어서 울었고 울다가 혼났다. 그 울음은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야-혹은 내가 좀 더 자랐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사라졌다. 

 -

 안녕의 세계는 자란다. 현관문 너머에도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안녕의 의미가 달라진다. 밖으로 나가 더 많은 세계와 사람들을 사귀게 되고, 이별의 안녕 다음에는 재회의 안녕도 돌아온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안녕이 아주 없음은 아니라는 걸 체득한다. 그렇게 의미를 바꿔가며 팽창했던 안녕의 세계는 넓어질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도로 영역을 좁히기도 한다. 현관문 밖으로 걸어나가는 사람들이 야속했던 내가 이젠 현관문 안으로 걸어들어와 문을 잠글 수 있음에 안도한다. 안녕, 하고 재빨리 선을 긋고 등을 보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지긋지긋해지고 나 자신조차 싫어질 것만 같을 때, 그 모든 너절함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게 해주는 단 한 마디. 안녕. 문을 걸어잠그고 다시 내면으로 돌아온다. 꼭꼭 숨는다, 안녕 뒤에.

 나는 이제 안녕기술자다. 사람들이 싫어지면 티나지 않게 마음에서 지워버린다. 안녕? 하고 잘도 인사하지만 사실 인사하는 줄도 모른 채 인사한다. 안녕! 하고 쉽게 돌아서지만 돌아서는 줄도 모르게 돌아선다. 그 모든 게 아주 쉬운, 몸에 익은 기술이 되었다. 지난 34년간 내가 연마했던 수많은 안녕들 덕분에, 안녕의 숙련공이 되었다. 아쉬운 것도 미련남는 것도 없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장에 대고 한참 손을 흔드는 아기를 바라보니 눈물이 난다. 아기가 아는 안녕, 내가 알았던 그리고 지금 안다고 믿는 안녕, 그리고 우리 둘 다 아직은 모르는 더 넓은 안녕의 세계가 있으리라. 언젠가는 그 안녕의 세계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2020. 1. 7. 00:02

 

 

 한참을 기어다니며 온 집안을 헤집다 겨우 낮잠에 든 아기. 숨소리가 새근새근하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그 작은 가슴께와 콧잔등을 바라본다. 나도 옆에 가만히 누워 머리를 맞댄다. 아기의 숨소리는 천국의 리듬. 평화롭고 사랑스럽지만 아주 작은 소란에도 쉽게 무너지는 아슬아슬한 이 천국은 하루에 한 시간만 개장된다. 아기의 눈꺼풀이 열리고, 힘없이 풀려있던 손가락이 꼬물거리기 시작하는 순간, 다시 정신없는 사바세계의 육아가 시작된다. 

 

 

 

 

 

2019. 8. 8. 15:16


아기침대에 함께 누워있을 때면 나는 조그만 돛단배에 우리 둘이 함께 누워있는 상상을 한다. 침대는 아기에겐 크고 내겐 조금 작은 사이즈다. 내가 다리를 쭉 펴면 침대 발치가 닿는다. 발이 침대 밖으로 나가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말고 아기를 감싼 자세로 함께 누워 낮잠을 청한다. 아기의 애착인형은 푸른 물고기 모양이다. 우리의 유일한 전리품, 작고 푸른 물고기 인형을 꼭 안고서 나뭇결 모양의 돛단배 위에 떠 있다 스르르 잠에 든다.

작은 배 위에서 나는 아주 평화롭고 또 안전한 어떤 장소를 상상한다. 파도가 세지도 않고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잔잔히 떠 있는 것이다. 아기와 나는 잠의 바다에서 작은 돛단배를 함께 타고 자다 깨다 옅은 잠의 항해를 한다. 잠에서 먼저 깬 나는 하나뿐인 승객인 아기를 살펴본다. 손엔 여전히 푸른 물고기가 들려있는 채 손바닥만한 이불을 덮고서 잠들어 있다. 역시 하나뿐인 선장 역을 맡은 나는, 잠의 바다에서 돌아올 아기를 위해 닻을 살피고 먼 구름을 내어다본다. 날이 너무 흐려지거나 거칠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어쩌면 여기서, 이 작은 배에 탄 채로, 시간이 멈춰도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2019. 7. 11. 14:00

 

 깜깜한 한밤중, 아기침대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숨이 막힐 것 같으니 살려달라는 절규다. 그 소리를 들으면 나는 한창 꿈을 꾸다가도 뚝 잘라먹고 현실로 소환된다. 꿈의 마지막 장면을 얼떨떨하게 재생하며 아기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아기는 엎드린 채 고개를 들고 울고 있다. 낑낑거리며.

 아기가 뒤집기를 마스터한 건 100일이 지나고서였다. 엉덩이를 번쩍 들어 옆으로 눕더니 뒤집고, 팔을 빼고 고개를 드는 일련의 동작들을 해내면서 아기는 뿌듯해했다. 뒤집고 나면 나 보세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이고 우리 아기 잘했네, 하면서 머리카락도 별로 없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아기는 좋아서 바둥거렸다. 나 뒤집었다고요! 뒤집었어요! 뒤집기를 마스터한 아기는 뒤집기를 자랑하며 항상 뒤집고 논다. 엎드려서 책도 보고, 앞으로 기어보기 위해 자벌레처럼 엉덩이를 들었다 내렸다 꿈틀거리기도 한다. 누워만 지내던 신생아 시기를 벗어나 이제 정말 '아기'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이 뒤집기가 아기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하루종일 뒤집기를 하다보니 몸에 배었는지 곤히 자다가도 자꾸 뒤집기를 시도한다. 뒤집고 나서 엎드린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계속 자면 좋으련만, 아기에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아기가 뒤집을 줄만 알고 다시 되집는 방법을 모른다는 데 있다. 어른이 다가와 다시 되집어줄 때 까지는 엎드린 채 그저 우는 수 밖에 없다. 수면의 질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뒤집기를 연마하기 전까진 쌔근쌔근 통잠을 잘 자던 아기가 뒤집고 나서부터는 새벽에 몇 번씩이나 깨서 운다. 덩달아 보호자인 내 수면시간도 조각조각 토막난다. 밤에 여러 번 뒤집어서 깬 날은, 아기도 눈 밑이 까맸다(아기도 피곤하면 다크써클이 생긴다). 밤에도 낮에도 아기는 엎드린 채 피곤해져 운다. 되집기를 몇 번 연습시켜봤지만 아직 멀었다. 

 아기가 처음 뒤집던 날을 기억한다. 고개를 들고 팔을 빼는 매 동작에 소리치며 환호했다. 아기가 할 줄 아는 게 생겼다는 게 마냥 기쁘고 신기했다. 그런데 요즘 뒤집기의 덫에 빠진 아기를 볼 때면, 고개를 쳐박고 엉엉 우는 모습에서 나 자신의 일부가 보이는 것만 같다. 내게도 작은 시작과 성취들이 있었다. 아주 잘 하진 못하지만 적당히 잘 하는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가끔은 그 적당한 성취, 고만고만한 능력이 나의 발목을 잡는다. 이를테면 글이 그렇다. 뛰어나진 못해도 적당히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운좋게 책을 내고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줄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아기로 치면 뒤집기를 막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그 뒤집기 이후로부터, 나는 가끔 좋은 글을 보면 탁 하고 숨이 막힌다. 좋은 책을 보면 독자로 그저 행복하고 즐거웠는데 이제는 막막해진다. 글을 조금씩 쓰기 시작하고 책을 내기 전까진 없던 증상이다. 뒤집기 전에는 몰랐던 답답함이다. 아주 작은 성취지만 그 성취가 발목을 잡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아예 아무 것도 하지 못할 때는 통잠이라도 잘 수 있었는데 뒤집기를 하게 된 후부턴 잠마저 설치기 시작한 우리 아기처럼. 

 아기는 지금도 뒤집고서 낑낑대며 나를 부르고 있다. 엎드린 채 오래 놀아 목이 아픈 모양이다. 오늘도 밤잠을 설치며 뒤집어진 채 울게 될테다. 뒤집어서 오히려 힘들어진 이 일상은 꽤 지속될지도 모른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되집기가 완성될 때까진. 아기는 하루종일 엎드린 채 되돌아가지 못해 힘들 것이고 나는 탁월한 글을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뒤집기 시작한 아기도 글을 쓰기 시작한 나에게도. 그 날이 올 때까진 계속 뒤집고 또 뒤집어보는 수밖에.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2019. 5. 13. 17:53

 

 아기를 키우는 일은 양가감정과 싸우는 일이다. 아기를 보살피다보면 이 아기가 말을 하고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잘 돌봐줘야겠다는 생각과,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곤 한다. 노트북을 들고 나가서 어디서든 글을 쓰고 싶고, 심지어는 직장으로 복귀하고 싶을 때도 있다. 글을 쓰고 일을 하는 건 나를 보살피는 일의 범주에 속한다. 나를 보살피는 일은 아기를 보살피는 일과는 대척점에 있다. 적어도 100일이 안 된 아기를 키우는 내겐 그렇다. 심지어 잘 하고 싶은 건 아닌데도, 그냥 적당히 둘 다 동시에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싶다는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돌한다. 아침나절에는 아기가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럽다가도, 몇 시간이 지나면 바깥 세상으로 관심이 이동한다. 보고싶은 친구들이 떠오르고 뉴스도 궁금해진다. 학위를 따고 회사를 만들고 책을 번역하고,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뤄내는 것처럼 보이는 지인들도 있다. 탁월해져 저 멀리 가버린 것만 같은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나면 갑자기 아기 트림 자욱이 남은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의 내가 보인다. 그러고보니 머리는 언제 감았더라

 라디오도 요즘 내겐 양가감정의 대상이다. 정확히는 지상파 라디오라는, 몸집은 무겁지만 변화는 더딘 이 매체가 그렇다. 좋으면서도 떠나고싶다.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애틋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라디오는 나의 가장 좋은 시절, 언제나 곁에 있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매일매일 밤늦게 잠들고 소설을 읽고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던 시기. 사연은 딱 한번 소개된 적 있다. <이적의 드림온>의 마지막 방송이었을 것이다. 박정언님이 보내신 문자입니다, 이적의 목소리로 소개되는 내 사연을 들으며 나는 자그마한 기숙사 방 안에서 아주 행복했다. 20대를 지나오며 라디오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 후에도 그랬다. 작게나마 내 팀을 꾸리고 디제이와 부스 안에 있으면 그 프로그램 안에선 작고 소박하게 기쁜 순간이 많았다. 

 한편으로 요즘 라디오는 더 이상 돌아보고 싶지않은, 좋았지만 그 때 뿐이었던 추억같다. 요즘같은 세상에 오래된 채널에서, 더군다나 라디오를 만든다는 건 어쩐지 외로운 고고학자의 조용한 발굴작업처럼 느껴진다.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을 그리워하며 과거를 파고들고 또 기념하는. 어쩌다 작은 사금파리를 발견하면 아주 기뻐하지만 알아주는 이는 드물다. 전설이었던 시절, 화려했던 전성기, 그 시절이 남긴 흔적을 애지중지 갈고 닦는 몰락한 제국의 고고학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번영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우리의 일. 

 라디오와 아기를 떠올리면 언제나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한다. 애틋하고 즐겁다가도 도망치고 싶다. 아기를 사랑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해진다.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은 공간이 그립다가도 족쇄처럼 느껴진다. 라디오라는 오랜 매체를 벗어나 에스타운이나 씨리얼 시리즈같은 장기 프로젝트를 해보면 어떨까. 개인적으로 아카이빙하고 싶었던 주제들도, 쓰고 싶은 글들도 떠오른다. 하지만 당분간은 책임져야 할 것이다. 아기를 그리고 월급 받는 만큼을. 

 두 가지 마음 속에서 갈팡질팡하다 울음을 터뜨린 날이 있었다. 아기가 타고 있는 스윙을 흔들어주다가 나도 모르게 와앙 하고 눈물이 터졌다. 아기는 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더니 활짝 웃었다. 우는 모양이,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표정이 신기하고 재밌는 모양이었다. 이후로도 아기는 내가 흑흑, 하고 우는 시늉을 해 보이면 소리까지 내면서 즐거워한다. 울던 나조차도 어리둥절할만큼의 큰 미소였다. 양가적인 마음은 정리되지 않았지만 - 아니 앞으로도 더 심해지겠지만, 우는 나를 보며 잇몸밖에 없는 작은 입을 활짝 벌리며 웃는 아기를 보는 게 웃겼다. 그 순간만큼은 웃는 아기를 보는 게 좋았다. 

-

 그나마 다행인 게 하나 있다. 라디오도 아기도 매일 매일 리셋된다는 점이다. 아기는 매일 자란다. 나의 기분도 그에 맞춰 매일 한 뼘씩 달라진다. 어제는 뛰쳐나가고 싶은 감정이 이겼다가 오늘은 보살피고 싶은 감정이 이긴다. 두 가지 감정 말고도 조금 더 다양한 감정들이 스며들기도 한다. 라디오 역시 오늘과 내일, 하루하루가 새롭게 다르다. 오늘 방송을 처참하게 망쳤어도 내일은 또 새로운 백지가 주어진다. 반대로 오늘 대박을 쳤어도 내일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도 라디오를 켜놓고 아기를 보살핀다. 어르고 달래고 먹이고 재운다. 라디오에서도 먹고 사는 이야기와 기쁘고 슬픈 이야기가 하루종일 이어진다. 매일 비슷하지만 매일이 새롭게 다르다. 아기와 라디오는 매일 새로 받아들어야 하는 백지장이다. 어쩌면 이 백지장이, 가능성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한다.

 아기와 라디오, 그리고 내일의 나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2019. 4. 22. 14:18

 

 아기에게는 안과 밖이 무의미하다. 일단 몸이 그렇다. 가장 중요한 머리조차 대천문과 소천문이 열려 있는 판이니 말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뼈 사이로는 몸 안의 숨이 팔딱팔딱 뛰어나온다. 탯줄이 떨어져나간 자리에 만들어진 배꼽은, 금방이라도 뱃속을 보여줄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검은 안쪽을 가지고 있다. 방금 먹어 안으로 들어간 우유가 바로 입밖으로 게워져 나와있기도 하고 

 안과 밖이 가장 무의미할 때는 외출할때다. 아기에게는 바깥세상이 똥오줌을 가려눠야 할 곳이라거나 옷을 갖춰입고 나가야 할 곳이 아니기 때문에, 안에서와 똑같이 산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비슷한 옷을 입고 같은 곳에 배변하고 잠도 (오히려)잘 잔다. 

 아기를 보다보면 안팎 구분 없이 사는 게 얼마나 편한지 실감하게 된다. 밖에 나갔다고 눈치를 보거나 다르게 행동할 일 없이 그대로 사는 것. 안과 밖을 인위적으로 나누지 않고 사는 것. 세상을 아기처럼 단순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9. 4. 11. 11:30

 

 집 앞 보도에 놓인 화단이 한창 교체중이다. 회색 점퍼를 입은 중년의 작업자 서너분이 둥그런 시멘트 화단 안에 고여있던 흙을 파내고, 새로 돋아나기 시작한 붉은 꽃을 심고 있다. 날씨가 부드러워 그런지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덩달아 부드러워보인다. 꽃나무를 조심조심 옮겨 심을 때 작업자의 얼굴에는 아주 옅은 기쁨이 서려있다. 작고 붉고 여린 식물을 다루며 중년의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다. 모처럼 길가가 환하다. 새로 피어나고 돋아나는 것들은 그저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을 누그러지게 만든다. 

 아기의 얼굴은 그 자체가 봄이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피부, 눈동자, 머리카락, 손톱과 발톱 모두가 아주 연하고 또 푸르다. 며칠 전엔 아기의 얼굴에 꽤 큰 상처가 생겼다. 아직 손발의 움직임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하는터라, 자기 손톱으로 얼굴을 자주 할퀴는 탓이다. 긁힌 자리는 깊게 패여 피까지 고여있었다. 기겁을 한 나는 연고를 발라주고 아침저녁으로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이틀만에 아물었다. 어디를 긁었는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만큼 감쪽같다. 다시 희고 보드라워진 아기의 피부를 한참 들여다봤다. 새 피부는 방금 옮겨 심은 작은 꽃나무처럼 붉고 희다. 아기의 얼굴을 보고있으면 나는 원시인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수만년 전 네안데르탈인이나 크로마뇽인들도 나와 비슷한 자세로 아기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컴컴한 동굴에서, 구석기에도 신석기에도 전쟁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낳은 작은 사람의 얼굴과 검고 작은 눈동자를 끊임없이 쳐다보고 또 쳐다보면서 그 안에서 봄을 느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희고 또 어여쁜지 감탄하면서 또 자신에게선 사라진 봄기운을 맡으며 놀라워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아기의 눈을 보다 거울을 본다. 내 눈에서는 사라진 빛이 아기의 눈에서 보인다. 이 빛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새끼를 낳아 기르고, 세상이 이렇게 돌고 돌아 내게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아기의 작은 눈동자 속에 삼라만상의 이치가 녹아있는 것만 같다.

 아기의 눈동자에는 아주 먼 과거와 아주 먼 미래가 동시에 잠들어 있다. 아기의 눈동자를 보며 원시인류를 떠올리다가도, 이내 몇십년 후를 상상하게 된다. 이 눈동자에 감도는 윤기와 총기도 언젠간 시들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아기를 낳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아기 역시 나와 비슷한 자세로 자신이 낳은 것의 얼굴을, 눈동자를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감탄하게 될까. 만일 내가 그 때도 존재한다면 꽤 늙은 채로 아기를 쳐다보며 어리둥절 놀랄 것이다. 우리 엄마가 어제 말한 것처럼,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너를 키우던 때로 돌아온건가'중얼거리며.

 미래의 나는 그 때 새로 만난 아기의 눈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을 것이다. 봄이 오면 좀처럼 집 안에선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언제 겨울이 가고 또 봄이 온건가, 시간의 흐름에 놀라고 의아해하면서. 봄을 보는 기쁨에 새로 젖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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