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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1. 22:21

(<조커> 스포일러 포함) 

 

 

 

이해로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해서 그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이가 적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그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간다. 이해받고 싶어서 또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해해야 인정하고 또 사랑하게 되므로,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라도 이해를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고 인정하는 일의 매커니즘은 희한해서 때로는 불가해한 대상에 더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이해해서 사랑하기도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서 사랑하게 되는 일도 흔하니까. 이런 종류의 매혹은 그 대상의 알 수 없음이 짙어질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문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해시켜야 사랑받을 수 있느냐, 불가해의 영역에 둘 때 더 빛날 것이냐. 이는 전적으로 수용자에게 달려있는 문제다. 우리는 다만 확률이 높아 보이는 쪽으로 배팅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이해받을 때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쪽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판단했다면, 잘 해야 한다. 잘 이해 시켜야 한다. 

 <조커>를 보고 나오는 길에 생각했다. 만일 이 영화에 영혼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영혼은 <조커>의 제작을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게 틀림없다. 아무리 호아킨 피닉스가 미친 연기를 한다해도 말이다. 내가 사랑했던 조커는 이해가 닿지 않는 영역에 있을 때 더욱 빛났는데, 이 영화를 통해 그렇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명백해졌다. 한국 아침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 영향을 받았나 싶을만큼 구구절절한 조커의 과거, 출생의 비밀과 학대와 세상의 냉대가 무리할만큼 한 캐릭터를 극단을 몰아간다. 자, 봤지? 이래도 미치지 않고 견딜 수 있겠냐고! 이래도 조커가 되지 않고 배겨낼 재주가 있냐고! 이런 과거가 있어서 이 캐릭터가 지금의 조커가 된거라고!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아 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구절절한 이해에의 시도가 끝난 뒤, 조커에 대한 나의 애정은 사라졌다.

 이중의 실패였다. 애초에 이해가 필요하지 않은 대상을 이해시키려했던 그 시도가 실패였고, 그나마도 이야기 안에서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다. 아서가 조커가 될 수 밖에 없는 과거와 맥락은 영화 안에서조차 서로 충돌하며 잡음을 일으킨다. 조커를 조커로 만드는, 살인에조차 일관성이 없다. 어머니가 친어머니일 때는 효자지만(세상에 조커가 효자다...) 충격적인 과거가 밝혀지자 그 역시 응징의 대상이 된다. 자신에게 잘해준 동료는 살려주지만 뒷통수를 쳤던 동료는 죽인다. 합리적 살인(?)처럼 보이지만 어떤 장면에 이르면 우리가 익히 알던 그 혼돈의 살인마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에 이르면 조커가 사람을 왜 죽인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진다. 응징하고 싶은 대상을 처벌하는 것인지, 다만 목적도 이유도 없는 카오스적 행위인지. 

 마지막 장면의 뜬금없는 각성과,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를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나오자 왠지 멱살이 잡힌 것만 같았다. 이래도?! 이 정도라고! 짧지 않은 140분여의 러닝타임을 통해 조커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만방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캐릭터를 이해해주기 바라는 애절한 구애의 몸짓, 하지만 그 끝에 마주하는 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조커의 탄생이라면. 이렇게나 비참한 과거를 짊어지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과거가 없어도, <조커>이전의 조커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었는데. 

 극장을 나오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해라는 좁은 문을 선택하는 것도 힘들고, 그 좁은 문을 제대로 통과해내는 건 더 힘들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모두 성공적으로 완수해 이해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린다. 처음엔 이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곡해 혹은 오해에 가까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다음에 계속)

 

 

 

 

 

 

 

2019. 10. 16. 13:52

 

 홍대 앞은 이상한 시공간이다. 언제 와도 비슷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막 사입은 게 분명한 계절감 가득한 옷차림, 어딘가 분주해보이지만 사실은 별로 분주하지 않은 발걸음, 설렐 일 하나도 없고 우울하기만 한데 또 그게 싫지는 않은 표정 같은 것들. 어리고 어여쁜 사람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표정으로 걷고 말한다. 자꾸 눈길이 가게. 

 사람들을 너무 빤히 보는 것 같아 괜히 민망해져 바닥을 보고 걷다가 아주 예쁜 단추를 발견했다. 빛이 약간 바랜 황동색에 크기도 아주 컸다. 유럽의 쇠락한 가문에서 전성기 휘장에 그려넣었을법한 화려한 무늬가 남아있었다. 겨울 아우터, 두꺼운 모직코트에서 떨어져 나온 게 분명했다. 순간 오래 전 즐겨 입던 벽돌색 모직코트가 떠올랐다. 스물 너댓살 무렵에 즐겨 입던 코트였는데 어느 날 보니 가운데 단추가 떨어져나가고 없었다. 옷 솔기에 여분 단추가 달려있나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단추가 유난히 동그랗고 커다랗게 달려 있어 하나가 없으면 너무 표가 났다. 단추가게에 가서 비슷한 단추라도 찾아 달아야겠다 생각하다보니 봄이 되었고, 다음 겨울이 되자 단추에 대해 잊었다. 그렇게 두세번의 겨울이 지난 후 어느 봄에 코트를 버렸던 것도 같다.

 버릴 때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내가 왜 이 코트를 입지 않았더라, 아마 유행에 너무 안 맞거나 싫증이 나서였겠지, 하면서. 작년에 안 입었다면 이유가 있으니까 버려야 할 거야. 그렇게 초록색 헌옷수거함으로 들어갔던 내 벽돌색 코트. 비싸고 좋은 코트는 아니었지만 딱 떨어지는 모양이 좋아서 아끼던 것이었는데. 단추가 사라져서 못 입었던 코트가 계절이 지나는 사이 싫증나거나 원래 안 어울렸던 코트로 둔갑해 버려졌다. 나 자신도 교묘하게 그렇게 믿어버리고 만다. 어디 내 벽돌색 코트 뿐이겠는가. 제때에 정확하게 기억해두고 바로잡지 않으면 대부분의 일이 그렇게 흘러간다. 사실은 A가 아니라 B가 문제였는데 A를 탓하게 된다. 스스로조차 왜 그랬는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 그래, 코트의 문제가 아니라 단추를 잃어버려 못 입은 것 뿐인데. 

 단추를 주워들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햇빛에 자세히 바라보니 꼭 그 단추처럼 느껴졌다. 스물 서너살엔 홍대에 자주 왔었고 그래서 여기 어딘가에 흘렸더래도 이상할 게 없으리란 생각까지 들었다. 홍대 근처에선 기분 좋은 약속이 많아 유난히 잰걸음으로 많이 걷기도 또 냅다 뛰어가기도 했으니, 이렇게 커다랗고 무거운 단추가 제대로 매달려 있기가 어려웠겠지. 이렇게 큰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줄도 모르고 젊은 나는 신나서 걷거나 달렸을 것이다. 잃어버렸다거나 사라졌다거나, 그런 종류의 상실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오늘 나는 내가 흘린 예쁜 단추를 주웠다. 단추를 주워 가방에 넣으니 가볍던 에코백이 묵직해졌다. 그 시절의 내가 가방에 웅크리고 들어앉기라도 한 것처럼. 

 

 

2019. 10. 16. 13:29

 

 지하주차장에는 한밤의 세차원이 다녀간다. 퇴근하고 나면 출근하기 전에 차를 세차해준다는 말에 냉큼 전화번호를 받아 명함을 저장하고 문자를 보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달간 세차해주는 데 오만원이다. 한 번 다녀가는데 만 이천원꼴. 버스도 지하철도 다 끊기는 한밤중에 와서 일하고 가는데 너무 싸게 쳐서, 대체 몇 대나 닦아야 고정적인 수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셈을 해보기도 했다. 

 어제는 한밤의 세차원이 다녀가는 날이었다. 아주 늦게 퇴근하고 아주 이른 출근을 해도 그 사이에 차를 닦을 시간은 얼만든지 있다는 듯 다녀간다. 잠이 오지 않을 땐 아무도 없는 지하주차장에서 왁스칠을 하고 걸레질을 해 낡은 자동차를 닦아내고 있을 분주한 풍경을 상상한다. 보닛과 휠을 공들여 닦고 유리창의 지문들을 지워내는 순간을. 남의 노동을 상상하면 왠지 내가 다 고되어져,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잠도 스르르 찾아오는데 겨우 돈 오만원에 지나친 호사를 누리는 것 같아 죄책감이 약간은 묻어 있는 스르륵이었다. 

 

 

2019. 10. 14. 22:53

 

 4년 전 베트남 여행에서였다. 호이안 구시가지 골목의 소담스럽고 예쁜 찻집에선 이런저런 소품들을 함께 팔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티팟들을 사오고 싶었지만 집에서 차분히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이 거의 없기에, 다른 기념품을 골랐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푸른색 물고기 모양의 천 인형. 허공에 달린 물고기는 푸른색 새 같기도, 헤엄을 치는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푸른 계열의 질감과 소재가 다른 다섯 가지 천으로 누빔이 되어 있었고 검고 작은 동그란 눈이 예뻤다.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떠올라 푸른 물고기 인형을 사왔다.

 마법같은 그 공간에서는 허공을 나는 푸른 새 같던 인형이, 집에 돌아오자 왠지 마뜩찮아보였다. 선물하기를 미루고 집에 둔지 오래. 버리자니 아깝고 원래 인형에는 소질이 없는 내가 가지고 있기엔 어중간했다. 이사를 하며 10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를 다섯 개 갖다버리던 날, 인형을 두고 잠깐 고민했던 것도 같다. 호이안의 적막하고 고즈넉했던 그 찻집의 분위기가 아까워, 버릴 수는 없었다. 

 인형이 쓰임새를 찾은 건 아기침대에서였다. 신생아 시절, 아기 침대에 휑하게 혼자 누워 있는 아기가 왠지 심심해보여서 친구라도 하라고 옆에 놓았을 뿐이었는데. 그 시절 아기는 손도 발도 제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도 가누지 못해, 옆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도 잘 몰랐다. 나도 인형을 굳이 치울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몇 달이 흘렀다. 아기는 아침이면 쑥쑥 자라있는 콩나물이나 상추처럼 부쩍부쩍 컸고, 언젠가부터 자기 옆에 누워 있는 푸른 물고기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곁에 가보면 물고기와 마주보고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몸을 좀 더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서는 티가 났다. 아기가 물고기를 몹시 좋아한다는 게. 멀리서도 '물고기!' 한 마디를 들으면 아기는 뒤뚱뒤뚱 바닥을 기어 몹시 빠른 속도로 푸른 물고기에게 다가와 지느러미 부분을 낚아챈다(그리고 입으로 가져간다). 물고기 인형을 손에서 뺏아들기라도 하면 아기는 할 수 있는 모든 소리를 지르며 항의의 의사를 표시한다. 아기가 물고기에게 하는 애정표현이란 온통 물고 빠는 종류의 구강기적 구애행위지만, 물고기를 볼 때의 그 표정은 확실히 사랑에 빠진 표정이 분명하다. 눈이 없어질만큼 환하게 웃으며 물고기를 쳐다보기 때문이다(아 질투나). 

 잠들 때면 물고기의 존재는 더 소중해진다. 분명 잠에 빠진 것 같은데도 두 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무언가를 잡고 싶어한다. 그럴 때 아 역시 엄마를 찾는구나, 하고 슬그머니 내 손을 쥐어줬다가 몇 번 패대기침을 당했다. 아기는 엄마나 아빠를 만지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 푸른 물고기, 푸른 물고기를 찾을 뿐이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 부분은 누비천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지느러미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지느러미를 좋아한다니 어감이 이상하지만). 아기의 손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누비 지느러미. 아기는 자면서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며 잠자리 밖을 벗어나기도 하지만 물고기를 놓치진 않는다. 두 손에 지느러미를 꼭 쥔 채 함께 굴러다닌다. 

 물고기 관리는 나의 몫이다. 침냄새가 풍기는 물고기를 삶아서 햇볕에 일광욕을 시켜준다. 아기가 다른 놀잇감에 정신이 팔려있는 낮시간동안만큼은, 푸른 물고기에게도 자유를 주는 편이다. 아기를 유인해야 할 때는 유용하게 쓰인다. 맘마 먹으러 와야지, 기저기 갈러 와야지, 이야기하는 대신 일광욕중이던 물고기를 손에 쥐고 흔들면 아기는 멀리서도 파바박 기어서 정확히 물고기를 낚아챈다. 너 어디 있었니 보고싶었잖아 하는 표정으로 침을 흘리며 물고기에게 함박웃음을 지어준 뒤 볼을 부비부비한 다음 물고기의 주둥이 부분을 입으로 집어넣는다(일광욕은 소용없어진다...). 

 심심해보이던 아기 침대를 채울 요량으로 굴러다니던 인형을 스윽 집어넣은 지 7개월이 지났다. 아기는 물고기 인형이 없으면 잠에 쉽게 들지 못할 만큼 물고기 인형에 애착이 생겼다. 표정을 보면 애착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에 빠진 것만 같다. 물고기의 푸른색은 삶통에서 몇 번 삶겨나오는동안 많이 옅어져, 이제는 어디를 봐도 낡은 물고기가 되었다. 호이안의 한적하고 우아한 찻집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던 푸른 물고기의 소담스럽던 자태는 사라진 지 오래다. 물론 아기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물고기 인형이겠지만. 

 물고기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잠든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모든 작은 행동이 어디선가 누구에겐가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한다. 7개월 전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버리지 못한 인형을 그냥 거기에 두었을 뿐인데. 그냥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인데. 그냥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그냥 사소한 선물이었을 뿐인데. 누군가는 그로 인해 사랑에 빠지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또 내겐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애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도 무엇을 그냥 던지기 전에 한번 더 떠올려본다. 호이안의 찻집에서 날아와 이제는 침범벅이 된 푸른 물고기 인형을. 아무것도 아니었다가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그 순간을. 

 

 

2019. 10. 14. 15:40

 

 

 요즘 나는 냄새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 정확히는 한 사람에게 어떻게 체쥐가 깃드는지를 목격하는 중이다. 나의 관찰 대상자는 당연히 우리 집 아기다(아기는 식생활부터 수면패턴, 흔적과 표정까지 모든 것을 내게 관찰당하는 중이다). 

 처음 아기에게서 맡은 냄새는 산뜻한 베이비바스향이었다. 산후조리원에서였다. 조리원에서는 아침 7시가 넘으면 아기들을 방으로 데려다주는데, 그렇게 배달되어 온 아기에게선 항상 향기가 났다. 아기를 각 방으로 데려다주기 전에 신생아실에서 뽀득뽀득 씻긴 탓이었다. 아기에게서는 원래 그렇게 아기 향과 파우더향이 섞인 좋은 냄새가 나는가 했는데 집에 데려와보니 그게 아니었다. 향이 강한 제품을 쓰지 않으면 아기에게선 주로 분유 냄새가 났다. 먹고 나서 잘 게우던 시기라 소화되다 만 분유의 비릿한 냄새와 아기의 땀이 섞인 냄새였다. 사람들이 아기 냄새라고 부르는, 달큰한 냄새. 아기 냄새는 주로 정수리와 목덜미 근처같이 땀이 많이 나는 곳에서 맡을 수 있었다.

 아기 냄새가 변하기 시작한 건 5개월 무렵이었다. 분유를 주식으로 삼다가 미음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쌀 미음과 채소 미음만 먹다가 처음으로 소고기 미음을 먹은 날, 낮잠을 재우느라 닫아뒀던 아기 방 문을 열자 낯선 냄새가 확 밀려왔다. 고기 누린내였다. 그 냄새에는 어딘가 조금 덜 유순하고 복잡한 구석이 있었다. 남의 살을 먹고 사는 동물이 풍길 수 밖에 없는, 약간은 공격적인 냄새였다. 어디에서나 쉽게 맡을 수 있는 사람의 냄새이기도 했다. 이후로 아기의 식단이 변할 때마다, 아기는 먹은 그대로를 자신의 체취로 뿜는다. 어제는 가지와 무, 소고기를 넣은 미음을 먹였더니 방문을 열자 푹 졸이고 삭혀진 무 냄새가 훅 하고 끼쳐왔다. 며칠동안 아기는 가지와 무 냄새를 자신의 냄새로 두르고 다닐 것이다. 닭고기 미음을 먹은 날은 닭죽 냄새가, 고구마와 밤 미음을 먹은 날에는 구황작물의 달달한 냄새가 난다. 입었던 옷과 머물렀던 방과 내뿜는 체취에서 고스란히 아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아기의 신진대사는 어른보다 조금 더 단순하고 또 정직해서일 것이다. 

 사람은 먹는 것 그대로가 그 사람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한지. 나는 먹는 그대로의 인간이다. 별달리 수식할 것도 꾸밀 것도 없이, 오늘 아침으로 먹은 고구마와 점심으로 먹은 샌드위치 그 사이에 마신 연한 라떼가 곧 나다. 내 안에서 그런 재료들이 뒤섞이고 곰섞여 내 몸의 일부가 될 것이고 내가 정신이라고 믿는 것을 작동할 연료를 공급한다. 거창하고 고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몇 가지 동식물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 단순한 삶의 작동 원리를 잊을 때 마다, 냄새가 나에게 이 사실을 일깨워줄 것이다. 아기에게서 나는 아주 정직한 냄새, 결국에는 내 냄새를 닮아갈 그 냄새가. 

 

 

 

 

2019. 8. 14. 13:02

 

 어제는 밤 10시쯤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미친 듯이 바람이 들이닥쳤다. 바람과 비가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아기방에 들러 잠자는 아기를 보고 있던 나는 전쟁이나 비슷한 재난이 닥친 줄만 알았다. 잘 자는 아기를 공연히 한번 더 쓰다듬고 있는데 빗소리를 듣고 놀란 남편도 안방에서 걸어나온다. 열어둔 창문들을 분주히 닫으러 돌아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온 집안을 분주히 울린다. 

 어른 둘은 놀라 눈이 휘둥그레한데 아기는 옆으로 누운 채 작은 손가락을 그러쥐고 잘만 잔다. 잠드는 타이밍을 놓쳐 여덟시까지 악을 쓰고 울다가 늦게 잠든 참이었다. 평온한 아기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놓인다. 

 돌풍과 비가 잦아들자 매미들이 일제히 울기 시작한다. 매미 울음소리는 언제나 조금 다급하고 또 사납지만 이번은 더하다. 서로 안부를 묻는 것 같다. 누구야 괜찮니? 누구는 무사하니? 누구는 안 다쳤니?

 태풍이나 돌풍, 우박과 벼락같은 심란한 날씨가 이어진 다음이면 어김없이 매미들이 운다. 더 절박하고 더 궁금한 목소리로 운다. 간밤에 다친 이는 없는지, 모두 무사한지, 아침을 다시 맞이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야기하면서. 

 다음날, 한낮의 쏟아지는 햇볕 아래로 걷는데 매미들이 아우성쳤다. 살아남은 기쁨, 마지막인줄도 모르고 불태우는 삶의 기쁨들이 소리로 전해졌다. 이제 곧 처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앞에 처서가 다가와있는 줄도 모른 채 또 하루 살아가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도리가 없다. 매미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존재가 될 수는 없으니까. 

 다만 비 긋은 후 더 열심히 우는 매미처럼, 목청껏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보고 외쳐보는 수밖에. 

2019. 7. 22. 18:37

 

 뭔가 필요해졌을 때 어디로 가야할까.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쿠팡? 아니... 교보문고다. 교보문고에선 무엇이든 다 판다. 요즘 유행하는 흑당밀크티, 김밥, 꽃, 장난감, 페디큐어, 안마기(안마기 체험코너는 교보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그리고 오늘은 변기클리너를 파고 있었다. 옆에서는 아름다운 음악들의 컴필레이션 모음집을 판매하는 중이었다. 하얀색의 특색없는 변기클리너, 8900원. 여기서 변기클리너를 사도 영수증에는 교보문고가 찍힐 것이다. 문화카드로 변기클리너를 살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변기클리너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문을 밀고 나오는데 바로 앞에 노숙인의 짐가방이 놓여있었다.

 '잠시 화장실 다녀옴니다 치우지 마세요 독거미 올림'. 

 

 

 

2019. 7. 15. 15:14

꼭 잡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꼭 잡으라고 말한다. 옆을 쳐다보니 세 살정도 되어보이는 아기가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다. 엄마는 다시 한번 아기에게 말한다. 꼭 잡아. 꼭 잡아야 돼. 우리 이제 같이 횡단보도를 건널거야.

 

꼭 잡아야 해.

서로를 꼭 붙든 채 횡단보도를 건너는 엄마와 아기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나 조심스러워 마치 아주 크고 험한 강을 함께 거슬러 건너는 것만 같았다. 하긴,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꼭 잡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꼭 잡지 않으면 이 짧은 횡단보도조차 무사히 건널 수 없을만큼 나약하니까.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누구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잊지 말고 언제나 서로를 꼭 붙들어야 한다. 꼭 잡아, 하고 계속해서 잊지 않게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샌가 매듭이 약해지고 옅어져 꿈에서나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함께 건널 짧은 횡단보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2019. 6. 20. 15:16

 

 요즘 가장 부러운 부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누구를 만나도 머리모양만 보인다. 길을 가다가도 드라마를 보다가도 심지어 나 자신의 과거 사진을 보다가도 머리모양에만 눈이 간다. 아 저 사람은 뿌리 볼륨감이 상당하구나. 아 저 사람은 머리숱이 적어서 펌을 해도 모양이 잘 안나오겠구나. 저 사람은 막 미용실에 다녀왔구나(제일 부럽다).

 요즘 가장 귀찮은 일은 바닥에 흘린 머리카락 줍기다. 머리카락들이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로 몸에서 탈락해나가고 있다. 어쩌다 한번 머리를 쓸어넘기기만 해도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에 가득 머리카락이 모인다. 속절없이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좋은 샴푸를 써도, 두피마사지를 해도, 심지어 머리를 감지 않고 버텨봐도 머리카락은 빠진다.

 얼마 전 미용실에 갔을 때 물어봤다. 머리카락은 언제까지 빠질까요? 200? 아니면 6개월? 머리 빠지는 게 멈추면 파마를 할 참이었다. 아기가 생긴 이후 한참 머리에 손을 대지 못해서 자연인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게 언제나 걸렸다. 6개월정도 지나면 대충 호르몬들도 정상으로 돌아올테니 머리카락도 그만 빠지지 않을까. 그럼 파마 해도 되겠지. 희망을 가지고 물었는데 약간은 맥빠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빠질 만큼 다 빠져야 멈춰요.”

 결국 파마는 기약하지 못한 채 머리를 자르기만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내 머리카락은 지금쯤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걸까. 빠질 만큼의 초반부에 막 돌입해서 가속도를 붙이려 하고 있는 중일까. 아니면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어 서서히 새 머리카락을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을까. 귀 옆으로 내려와있는 잔머리를 몇 가닥 만지작거려봤지만 역시나 머리카락의 의중은 알 수 없었다(만지면 만지는대로 또 빠질 뿐). 100일이든 200일이든 1년이든, 빠져야 하는 만큼의 분량을 채운 뒤에야 멈출 수 있으니 머리카락도 그저 쓸려나가느라 무력하기만 할 것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분량이란 건 있지만 그 분량을 소진하는 시간은 다르다. 누군가는 100일만에 그 머리가 다 빠져버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1년에 걸쳐 빠지기도 한다. 드물고 또 운좋게는 분량이 조금 적게 주어지기도 해,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을런지 모른다. 어쨌든 분량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분량을 채워야 한다. 모든 일이 그렇다. 분량을 채워야 끝이 나고 또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멈춰있다. 그것도 한 가운데. 머리카락들은 미친듯이 빠져나가고 다음이 언제 올지는 아직 모른다. 1인칭의 세계에 딱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나로 시작하고 나로 끝난다. 그렇다면 여기 멈춰선 채 흘려보내야 하는 나의 분량은 얼마만큼일지 생각하게 된다. 얼마나 빠져야 다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기 시작할지. 그리고 여기서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지. '나'로 시작하는 1인칭을 벗어나 자유로운 3인칭의 세계로 돌입할 수 있을지. 그래서 비로소 나 말고 타인에게도, 의미가 생길지.

내게 주어진 지금의 분량을 알지 못해 오늘도 이렇게 1인칭 기록을 남기며 머리카락을 줍는다. 정말 많이도 빠진다. 

 

 

 

2019. 6. 12. 14:50

 

 동네 요가센터에 등록한 건 운동 때문이 아니었다. 운동이 목적이었다면 좀 더 번듯한 센터, 기구가 갖춰져있고 회원들이 그럴듯한 레깅스를 입고 나타나는 곳을 찾았을 것이다. 인스타그램 홍보페이지를 따로 운영하고 날씬한 선생님들이 화보같은 자세로 홍보 전단을 뿌리는 센터들. 동네 요가센터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 집에서 입고 있던 늘어난 반팔티셔츠를 그대로 입고 가도 괜찮았다. 장소는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마련된 강당이었다. 운동보다는 동네 친구를 찾으러 간 내게 적당한 장소였다. 휴직기간동안 말동무가 되어줄 동네 친구, 이왕이면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드디어 개강날.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아무도 없어 혼자 카페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사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제일 먼저 매트를 펴고 앉았다. 요가 수업을 들으러 온 회원은 여덟 명 남짓. 연령대는 다양했다. 여느 요가수업처럼 잔잔한 뉴에이지풍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하고 선생님과 회원들이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 근데 저번에 그 택배는 어떻게 됐어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제일 앞에 앉아있던 한 회원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글쎄 그때 그 택배 그래서 앞집에서 찾아갔어요? 자초지종은 이랬다. 앞집 아주머니가 집을 비운 며칠 사이 식료품으로 추정되는 택배박스가 도착했는데, 앞집 아저씨가 도무지 택배를 들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거였다. 듣고 있던 옆자리 회원이 거들기 시작했다. 손은 여전히 합장을 하고 다리는 나비자세를 한채였다. 아니 우리집 양반도 택배가 안보인대! 그게 글쎄 문 앞에 버젓이 놓여져 있는데도. 그렇게 커다란 사이즈로. 근데도 보이질 않아서 못 들고 들어왔다는거 있지!

 아니 저희집도 그런데... 이야기는 선생님이 한마디를 거들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단계에 진입했다. 아니 쌀을 시켰는데 제가 들고 들어오기 너무 무거워서 들어다 달라고 부탁을 했거든요, 근데 글쎄 그걸 계속 까먹더라고요! 선생님은 요기니답게 길다란 팔로 휘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선생님의 말이라 그런지 회원들은 더 격렬하게 공감했다. 맞아맞아 쌀이 없으면 밥은 어떻게 지으라고! 대체 왜 택배가 안보인다는거야! 

 결국 그날 나는 한마디도 거들지 못했다. 핑퐁처럼 오고가는 남편과 택배 에피소드에 내가 거들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돌아가며 에피소드를 하나씩 꺼내놓고 나서야 수업은 천천히 시작됐다. 말하자면 50분 수업 중 15분은 근황토크였다. 입부터 풀고 몸을 푸는 플로우랄까. 그래, 그렇다면 나도 에피소드를 준비해야겠다. 동네 요가센터 첫 수업을 마친 날 나는 골똘히 남편에 대해 탐구했다. 남편이란...무엇인가. 남편에게 보이지 않는 택배란...무엇인가. 에피소드가 없다면 거들기라도 잘 해봐야겠다.  

 대망의 다음 수업날.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채였다. 합장과 나마스떼, 조용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인사를 나눴다. 근황토크가 시작될 차례였다. 역시나 맨 앞자리에 앉은 회원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아니 근데 403동에 있던 학원은 왜 문 닫은거야? 혹시 알아요? 아니 거기가 그렇게 싹싹하고 괜찮았는데... 

 나는 이번에도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날의 근황토크는 이른바 불법학원이었다. 등록하지 않고 영업하는, 소위 공부방. 회원들은 어느 공부방이 남아있고 어느 공부방이 진도를 잘 빼는지에 대해 한참 정보를 교환했다. 결론은 역시 멀더라도, 공부방보다는 학원에 셔틀을 태워 보내는 편이 낫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아직 학원을 보낼만한 나이대의 자녀가 없는 회원들은 자신의 오래 전 경험담을 보탰다. 아니 글쎄 제가 학교다닐 때도 공부방이 있었는데요... 그랬는데 말이죠... 모든 대화는 속전속결로 이루어졌고 이야기는 금새 결론에 다달았다. 마치 잘 짜여진 소그룹 분임 토론을 보는 것 같았다. 주제를 던지를 사람이 있고 핑퐁처럼 받아치는 회원이 있었고, 선생님이 개입해 이야기가 풍부해지면 이윽고 짧고 또렷한 결론이 내려졌다. 남편들 눈에는 택배가 보이질 않는다, 가까운 공부방보단 먼 학원이 낫다, 땅땅땅.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수업날. 나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도 근황토크에 끼지 못한다면 차라리 운동이라도 열심히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곳은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에 적합한 센터는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회원 중 누구도 선생님의 자세를 제대로 따라하지 못했을 뿐더러 요가보다는 오십견 방지 스트레칭에 가까웠다. 근황토크 주제를 던지곤 하는 핵심회원이 오십견 환자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역시나 음악이 깔리고 나마스떼와 동시에 셋, 둘, 하나. 오십견 환자이자 핵심회원이 뒤를 돌아보며 토크주제를 던졌다. 매번 주제를 던지는 그녀에게선 마치 <강심장>이나 <세바퀴>와 같은 왕년의 떼토크 MC, 강호동이나 김구라같은 풍모가 엿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는 현란한 떼토크 속에서 언제 발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말석 출연진이었다. 입술만 달싹달싹하는. 그녀가 주제를 던진다. 셋, 둘, 하나, 나는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일동 긴장) 

요즘 단지장 가보신 분? 닭강정 아직 팔아요?

 아... 오늘도 역시나 나는 근황토크에 끼지 못했다. 요일마다 돌아가며 열리는 장터에 나가본 적은 있지만 닭강정을 사먹어 본 적은 없다. 물론 이제와 부랴부랴 사먹어봤자 다음 수업날의 근황토크는 또 다른 주제가 될 게 뻔하다. 게다가 나는 다른 건 다 좋아하면서도 튀긴 닭은 좋아하질 않는다. 나를 뺀 회원들이 열심히 닭강정의 양념과 닭의 신선도 그리고 닭강정 아저씨의 친절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심심해진 나는 혼자 스트레칭을 했다. 동네 요가학원에 적응하기 이것 참 쉽지 않구나, 근황토크란 대체 무엇인가, 핵심회원의 랜덤 주제선정과 결론지음은 어떤 알고리즘을 통해 도출되는가, 떼토크에 끼지 못하던 한시절의 패널들의 마음을 이젠 알겠다, 무엇보다 나는 왜 여기에 다니고 있는가...고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