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177)
A (177)
(150)
아기의 비밀 (17)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A/글'에 해당되는 글 150건
2019. 6. 7. 14:07

 

 

 올 초 이사를 하며 지나치게 많은 짐을 버렸다는 걸 깨닫는 요즘. 필요한 걸 찾다가 없어서 갸우뚱...하다보면 알게된다. 아, 내가 버렸구나.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일곱장을 꽉꽉 채워 버리면서 그것도 버렸구나. 

 책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다시 읽은 무라카미 관련 에세이가 하도 재밌어서 뭐가 됐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다시 보고싶어졌다. 책장을 뒤지다보니 아뿔싸 한 권도 없다. 다 버렸다. 

 결국 알라딘에서 책을 다시 주문했다. 역시 아무나 버리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그냥 적립해두며 살아야겠다. 

 

 

 

 

2019. 5. 30. 15:03

 

 

 개봉날을 기다려 아기를 맡기고 <기생충>을 보았다. 집 근처 메가박스는 CGV에서 간판만 바뀌고 내부는 모두 그대로인데, 다행히 사운드MX관만은 의자를 비롯한 모든 시설이 바뀌었다. 영화 한 편을 보러 오면서도 혹시 아기를 보는 분에게 연락이 올까, 마음이 초조해 불빛이 보이지 않게 휴대폰을 들썩였다 놓기를 반복했다. 

 영화를 다 보고 걸어오는 짧은 순간 생각했다(내겐 요즘 시간이 아주 짧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나이드는 일과 숙련되어가는 천재에 대해. 봉준호는 처음부터 천재였고 지금은 노련한, 숙련된 천재다.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일과 숙련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스스로를 노련하게 담금질하는 일 중 어떤 편이 더 갖기 어려운 행운일까. 지금은 추락한 한때의 천재들과 꾸준한 범재들을 떠올려보지만 갸우뚱하다. 어쨌든 분명한 것 하나는 천재성을 가지지 못한 나같은 평범자들에겐, 애초에 선택권이 없다는 점. 그게 오히려 얼마나 더 편한지 모른다. 

 짧게 조각나있는 자유시간들을 여러 갈래에 담을 수는 없다. 하나에만 집중해야 한다. 

 

 

 

2019. 4. 25. 18:20

 

 대학로의 오래된 병원에는 병원답지 않은 정취가 깃들어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300년된 은행나무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주치의가 들어왔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주치의는 그 사이 부교수가 되어 있었다. 병원에 남아 있는 나의 첫 진료기록은 2006년. 턱관절이 벌어지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처음 만났던 주치의는 당시 레지던트였다. 나는 스무살이었고 주치의 역시 20대 후반이었다. 남쪽지방 사투리와 섞인 억양 덕분에 고향이 어디라는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던 것도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13년 전 수더분하고 어리던 주치의는 이제 진료실 앞 스크린의 사진 속에서 팔짱을 낀 채 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사투리가 남아있는 특유의 억양이 있어, 이 교수가 그 시절의 레지던트였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나게 할 뿐이었다. 

 "그럼 어금니를 빼면 안된다는 말씀이신가요?" 치과 의자에 길게 기대 앉아있으니 옆 자리 남자의 고통이 들려왔다. 곤란한 상황인 것 같았다. "아뇨 이 어금니 주위가 붓고 아프시니 빼는 게 맞긴한데... 어금니를 빼는동안 턱이 많이 힘드실거예요". 어금니와 턱관절에 동시에 문제가 있는 남자였다. 이를 빼면 관절에 무리가 가고, 관절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빼지 않으면 주변 이까지 상하게 된다. 남자와 주치의는 한참동안 고민하는 것 같더니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시죠". 진퇴양난에 빠진 남자가 아이구...하고 한숨을 쉬는데 마침 그의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이면 가사에 이를 악물고 너를 잊을게...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는 휘성의 발라드였다. 이를 악물고 너를 보낼게 사랑 앞에 나는 죄인이야... 절절한 가사를 듣다보니 새삼 경각심이 들었다. 그렇다 이는 절대로 악물어선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이를 무는 습관 때문에 턱관절이 아프고, 여기까지 와 누워있으니까 말이다. 저도 아기를 낳으면서 이를 너무 악물어서 10년만에 여기 다시 왔거든요. 저희 이제 절대로 이 악물지 말아요. 얼굴을 덮은 온찜질팩을 들추고 나도 모르게 말을 건넬 뻔 했다. 휘성의 노래가 다 끝나갈 때까지 남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엔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버스는 종로 거리를 천천히 가로지르다 종로3가 버거킹 앞에서 정차했다. 활짝 열린 버거킹 2층의 창문 너머로 중절모를 쓴 두 노인이 보였다. 커피를 앞에 두고 나란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로3가 버거킹엔 여전히 아주 노인이거나 아주 젊은 사람들만 있는 모양이었다. 널따란 탑골공원과 높이 솟은 어학원에서 나온 사람들. 그 외엔 한산했는데, 여기저기 임대 표지판이 많이 붙어 있었다. 종각 역 앞의 스타벅스와 만년필 전문점마저도 사라진 채 공실이었다. 변한 게 많아보이는 종로거리는 왠지 스산했다. 그 안에서 여전히 커피를 팔고 있을 한 여자가 떠올랐다. 

-

 여자는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오래된 상가에서 30년 넘게 커피를 배달하는 일을 하며 살아온 여자는 가진 게 없었다. 가족은 아프거나 힘들었고 커피 장사도 내리막길이 된지 한참이었다. 500원짜리 커피값마저 제때 지불하지 않는 고객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여자의 얼굴엔 평화가 깃들어 있었고 입술에선 사랑의 말이 흘렀다. 여자는 자신이 커피와 라면을 배달해주는 주위 상인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매일같이 작은 점방에서 성경을 펴놓고 기도를 올렸다.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를 처음 만나고 돌아온 날 나는 진짜 신앙이란 이런 거구나, 작은 예수의 모습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을 위해 섭외해 만난 여자였지만 이후 몇 번을 더 찾아가 안부를 묻곤 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헤어지는 길에는 항상 근처 건어물전에 들러 마른 과자라도 쥐어주고 싶어해 한사코 사양해야 했다. 

 여자를 마지막으로 본 건 2년 전 겨울이다. 근처에 들를 일이 있어 겸사겸사 찾아간 여자는 그날도 작고 빛이 들지 않는 좁은 가게에서 성경책을 펴놓고 있었다. 낡아빠진 목도리를 맨 차림이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었어서, 목도리라도 선물로 사들고 올걸...하고 잠시 아쉬워하는데 여자가 성경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을 열고 귀기울여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신실하고 이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듣던 내게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단체의 요한계시록 설교가 유명하다고 말했다. 요한계시록. 제대로 읽어본 적 없지만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마지막 챕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계시록에 대해 잘 아느냐고 물었다. 기성 교회를 다녀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며 내게 팜플렛을 쥐어줬다. 

 집에 가는 길에 검색해본 단체의 홈페이지에선 웬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재림예수로 소개하고 있었다. 

-

 오늘 아주 오랜만에 그 거리를 다시 지났다. 종종거리며 커피와 라면을 배달하던 여자는 잘 지내고 있을까. 한겨울 차가운 내 손을 잡으며 건강하라고 기도해주던 그 손은 그대로일까. 순간 버스에서 잠시 내려 찾아가볼까 고민했지만 하차 벨이 눌러지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거기 그대로 있을 것이다. 여전히 새벽기도를 다니고 성경을 읽으며 낡은 옷차림이지만 환하고 평화롭게 웃고 있을 것이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현하고 있을 터였다. 변한 건 내 마음이었다.

-

 집에 와서는 턱관절을 위해 새로 맞춘 스플린트를 착용해보았다. 스플린트를 처음 맞췄을 때 느꼈던 이물감은 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했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낮에 지나온 오래된 거리를 생각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들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교차하던 그 풍경을. 

 

 

2019. 4. 3. 14:49

 사흘만에 간신히 외출해 집 근처 카페에 들렀다. 쓰고싶은 글이 있었는데 배경음악으로 Lonely가 나와 그냥 앉아만 있는다. 며칠 전 꿈이 떠오르는 노래다.

 꿈은 사라져간 것들의 무덤이다. 실종된 친구, 허물어진 공간, 과거의 사건, 그리고 정말로 죽어버린 사람이 등장해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다 날이 밝아오면 다시 사라져간다. 그들 각자의 무덤 속으로. 

 

 

2019. 3. 23. 14:18



 진부하다는 말은 대개 나쁜 뜻으로 쓰인다. 새롭지 않고 예상가능하며 낡아빠진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싶을 때, 진부하다고 말한다. 창의적인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나 말고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정확히 똑같이, 그대로 행했을 것 같은 모든 행동들과 생각들. 나 역시 스스로가 진부해서 맘에 들지 않았다. 반짝반짝한 면모를 드러내야 하는 일 앞에선 자신없어질 때가 많았다. 내 생각, 내 말, 내 행동, 내 결과물이 진부함 그 자체인 것 같아서.


 그런데 요즘 진부하다고 여겨왔던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기를 낳고 나서부터다. 이를테면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이 그렇다. 진부한데다 건방진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로 예전에 내가 알던 그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두 팔을 만세한 채로 자는 아기를 보고 있을 때, 트림을 시키느라 깜깜한 새벽녘에 졸린채로 아기의 등을 하염없이 두드리고 있을 때, 아주 작고 따뜻한채로 내게 폭 안겨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엄마도 나랑 똑같았을까 생각한다. 30여년 전 나보다 조금 더 젊은채로, 밤에 잠못이루고 아기를 재우거나 기저귀를 갈고 있었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 이상하게도 금방 눈물이 차오른다(역시 호르몬 때문인가?).


 자식을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 말고도 이런 말을 새로 생각한다. 자식을 낳고 나면 잃어버렸던 유년을 다시 산다는 말. 아기를 보고 있으면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하루종일 손을 꽉 쥐고 있어서 손에서 나는 발꼬랑내, 이가 하나도 없어 맨들맨들한 분홍색 잇몸, 눈을 꼭 감아 일자로 만들고 악을 쓰고 우는 얼굴에서(나는 세상 순둥이였댔으니 이건 아닐듯).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한때 나였을것이 틀림없는 어떤 모습들. 아주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들. 아기를 보고 있으면 겸손해진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나 아닌 타인의 노력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이젠 모른 척 하려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정말 진부하게도, 아기를 낳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말에 공감하게 됐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데 이 사람들 모두 갓난아기였을 것 아닌가. 혼자서는 목도 못 가누고 밥도 먹을 수 없는 그 절대적인 무기력의 상태로 모두가 세상에 태어났을 것 아닌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아주 무기력한 아기였는데 걸어다니고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또 사람을 낳아 키운다. 아주 무력했는데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그게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며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멈추게 된다. 경이롭게 바라보게 된다. 이 세상이 이렇게 재생산되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걸 이제야 또 느끼고 있구나. 


 진부하다는 말을 달리 생각한다. 진부함 속에는 위대함이 숨어있다. 내가 짐짓 진부하다고 느꼈던 것들은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아는 척 하고 싶어했던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그 마음, 존재 자체가 주는 기쁨같은 것들. 예전에는 그저 뻔한 수식어라고 생각했던 표현들. 그 진부한 말이 진실을 품고 있었단 걸 깨닫는다. 사실은 더 이상 적확할 수 없다고까지 느낀다. 


 말을 새로 깨치고 표현을 다시 생각하는 요즘. 이젠 진부하다는 말이 싫지 않다. 뻔하지만 계속 보게되는 주말연속극처럼, 예상 가능한 신파에서 흐르는 눈물처럼. 요즘 나는 진부한 모든 것들이 새롭다. 


 








2019. 3. 14. 13:55



 사실 냄새보다 더 강렬했던 건 소리였다. 내가 입원했던 12층 병동에는 열 개 남짓한 병실이 있었는데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환자분들이었다. 새벽이면 맞은편 병실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잠을 깨야 했다. “나~쁜년! 니가 그랬지~” “아니 이 할배가 뭐라하시노!” 성미가 괄괄해보이는 할아버지 환자분이 소리를 지르면, 간병인 역시 못지 않은 소리로 응수했다. 처음엔 부부싸움인줄 알고 깜짝 놀라 의료진이라도 불러야하나 싶었지만 이내 익숙해져갔다. 두 분은 내가 퇴원하는 순간까지도 싸우고 있었다. 



 “부산에 가자 부산에 가자...” 이튿날 잠을 깨운 건 어떤 할머니의 애절한 목소리였다. 부산에 가자, 부산에 가자... 뭐 타고 가실거예요? 하는 간호사의 물음에 할머니는 대답했다. 우리 아저씨가 밖에 차 세워놨다 부산에 가자... 부산 가면 뭐 있으신데요? 부산 가면 유치원 있다 부산에 가자... 끊임없이 부산에 가자고 하던 할머니는, 아침만 드시고 출발하자는 다독거림에 다시 병실로 돌아가셨다. 아마 아침을 잡수시고 나서는 부산에 가야한다는 것도, 할아버지가 차를 세워 놓으셨다는 것도, 부산에 다시 가보고 싶은 유치원이 있다는 것도 모두 잊으셨을테지만. 



 새삼 KBS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병실이 문을 열어두고 지낸터라 어디에서 뭘 하는지, 뭘 보는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다. 일요일 아침엔 <전국노래자랑>에서 아이유의 좋은날 3단고음을 뽐내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온 병동에 울려펴졌다. 진품명품을 지나 몇 개의 낮 뉴스 프로그램이 나른하게 오후를 채우고 나면 드디어 하이라이트. 병동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KBS주말극이다. 덕분에 나도 시청률 50%를 넘본다는 <하나뿐인 내편>을 접했다. 최수종 유이 주연의 간 이식 드라마. 단 2회차를 봤을 뿐인데도 인생드라마로 등극했다. 충격적인 대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너 우리 아들한테 간 줄 수 있니?” (토끼와 용왕님인가??) “우리 이러면 안되잖아요. 외국으로 도망가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이혼하고 다시 만나는 부부의 대사. 네에??). 여튼 절절하게 간을 꾸러 다니는 어머니 역할에 열연을 펼치는 중년 연기자에게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 이름이 도란이인데, 돌아서 도란이라고 지은건가...욕하면서 보는 게 주말드라마라더니 집에 돌아와서도 이 드라마가 보고 싶었다(하지만 아기가 자고 있어 볼 수 없었다).  



 <하나뿐인 내 편>의 간 꾸러 다니는 소리가 잦아들면, 병동의 일주일 역시 끝나간다.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열려있던 문도 스르르 닫힌다. 다시 아침이 되어 환자식이 보급될때까지는 고단한 잠에 빠져드는 시간. 병동은 다시 고요해진다. 나이트 근무를 서러 나온 간호사들의 교대소리, 환자와 보호자들의 코 고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링거줄을 교체하러 들어오는 의료진들의 문 여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반복되는 부산 가자, 이 나쁜 년 니가 그랬지, 그리고 KBS의 아침뉴스를 알리는 중저음 앵커의 목소리. 휠체어 끄는 느릿한 발걸음들 위로 주말이면 다시 들려올 도란이의 울음소리. 짧았던 병원 생활의 잊을 수 없는 소리들이다. 






2019. 3. 8. 09:10



병원 진료가 있는 날이라 아침 일찍 여의도엘 왔다. 링거 꽂은 자리가 아직 아물지도 않았는데 피를 다시 뽑고, 진료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병원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날씨가 좋다. 게다가 3월이다.

3월 초입은 언제나 설렌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은 찬 공기도 좋고 여기저기 보이는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좋다. 나는 아직 두꺼운 옷차림이지만 성급하게 얇은 플로럴 패턴이며 트렌치를 꺼내입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더할나위없이 좋다. 매년 생일이 3월 초에 있어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사람들과 짧은 안부나마 나눌 수 있는 일도 좋다. 사람을 들뜨게 하지만 아직 춥고 또 가끔은 눈도 내리는 계절이라는 점에서 3월은 신기한 달이다. 대체로 다정하지만 동시에 몹시 쌀쌀한 면이 있다고 해야할까.

이 곳, 여의도에서 느끼는 3월의 공기는 더 각별하다. 좋아하는 계절에 좋아하던 장소에 머무는 기분이란. 약간 씁쓸하지만 여전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무작정 들뜨거나 행복하진 않지만 그래도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이 많은 장소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내가 좋아했던 거래소 앞 대로변의 큰 나무들이 푸릇푸릇해지겠지. 그러면 또 그 길을 걸으러 올 수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3월의 이 다정하지만 쌀쌀한 기운이 가시기 전에,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발걸음으로.






2019. 3. 3. 11:39




출산 20일만에 재입원을 했다. 원인 모르게 40도까지 오른 고열로 난생처음 씨티촬영을 하고 사흘째 입원실에 누워 창밖만 바라본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를 거쳐 검사를 했지만 뚜렷한 병명은 모른다. 3월이라 막 병원 생활을 시작한 젊은 인턴들이 쭈뼛쭈뼛 여기저기를 찌르고 갔다. 희한하지만 여튼 그 서툰 손길에서 봄이 느껴지기도 한다.

병원 생활은 냄새와의 싸움이다. 링거 줄을 밀며 복도에 나가면 여기 저기서 죽음이나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의 고된 냄새가 풍긴다. 그 뒤로 소독용 알코올냄새가 감춰져있다. 내게서도 냄새가 난다. 링거때문에 매일 씻지 못해 풍기는 쉰내, 그리고 아직 어린 갓난아기를 둔 엄마의 젖비린내 같은 것들.

새 환자복에서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냄새가 풍긴다. 색이 바랜 이 환자복을 지나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이 남긴 냄새. 고통과 절망과 희망이 오락가락하며 남긴 냄새의 자욱들이 소독약에 희석된 채 희미하게 내 몸에도 가라앉는다. 내 다음으로 이 환자복을 입을 사람은 또 여기서 무슨 냄새를 맡게될까.

며칠이라도 병원에 있어보니 일상의 냄새가 그리워진다. 내 집 현관을 열면 끼쳐오는 익숙한 체취, 밥 하는 냄새와 살아가는 온갖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그 일상의 향기들. 오래된 옷과 살림에서 풍기는 묵은내. 후각을 안정시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

참, 오늘은 나의 서른세번째 생일이기도 하다. 잊을 수 없는 냄새들로 기억될 묘한 생일이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좋은 일들이 더 많았음은 틀림없다. 기다려지는 냄새, 돌아가 다시 맡고 싶은 냄새들이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말이다. 부디 다음주쯤엔, 다시 익숙한 냄새의 세계로 귀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아기 냄새에게로.






2019. 2. 14. 11:58




 설 연휴 마지막날. 망원시장을 한바퀴 돌고 한강공원에 잠시 들렀다 찹쌀도너츠를 사러 서대문 영천시장까지 다녀왔다. 휴직이 시작되자마자 설 연휴였던지라 입사하고 처음으로 연휴를 내리 쉰 참이었다. 낮잠도 자고 밥도 배부르게 먹고 잠에 든 참이었는데 새벽녘에 양수가 터졌다. 정말로 양수가 터져보니 모든 게 확실했다.


 황급히 머리만 감고 짐을 챙겨 병원으로 갔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집안 불은 다 끄고, 코드도 다 뽑은채로. 약간 떨리고 황망했다. 예정일이 다 되긴했지만 예정일이 지난 다음 나올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엿새 쉬었는데 바로 나와버리다니. 왠지 억울한 마음이랄까. 다음날엔 산발이 된 머리를 다듬고 눈썹 정리도 하려고 미용실을 예약해둔 참이었다. 아 내 미용실 아 내 브로우바... 아쉬운 마음으로 새벽 강변북로를 달려 병원에 도착하니 새벽 네시였다.


 분만병동에 내가 들어가자 자리가 꽉 찼다. 모두가 진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산에는 어딘지 종말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예감하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끙끙대며 누워서 각자 몫으로 주어질 고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깊은 새벽이었지만 분만대기실의 그 누구도 잠에 들진 못했다.


 새벽 여섯시쯤 되자 병동에 불이 켜졌다. 내게는 유도분만이 시작됐다. 양수가 터지면 24시간에서 48시간 안에 아기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촉진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촉진제를 쓴 유도분만의 경우 진통이 더 심하다는 걸 전혀 몰랐다). 그 때만 해도 그 날 저녁이면 아기를 낳고, 저녁 식사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교수님 퇴근시간 전에 열심히 힘을 내서 마무리하자! 그렇게 속으로 혼자 다짐도 했던 것 같다. 


 -


 진통이 시작되면 분만이 진행되는데 내 경우엔 그 진행속도가 워낙 더뎠다. 기약없는 진통만 계속될 뿐이었다. 열 시간이 지나도 10퍼센트, 스무 시간이 지나도 20퍼센트. 기껏 내진을 하고 갔는데 아까랑 똑같다고 했을 때의 그 절망감이란. 시간이 지나고 분만대기실에서 나와 함께 진통을 하던 다른 임산부들이 하나 둘 분만장으로 옮겨졌다. 그나마 옆 사람의 가쁜 심호흡이 들려올 때는 덜 외로웠는데 텅 빈 분만대기실에 있으려니 시간은 어찌나 느리던지. 


 사람들이 진통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끊임없이 멘트를 하며 자신의 고통을 어필하고 덜거나(아이고 배야 배야 배가 너무아파요), 무음으로 신음하는 쪽이었다(끙끙 호흡 한번 또 끙끙). 내가 대기하던 분만병동엔 외국인 산모도 있었다. 각자 할 수 있는 각자의 말과 방식으로 열심히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정말이지 누구도 덜어줄 순 없는 종류임엔 확실했다. 이미 배에 들어있는 아기를 안 낳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잠깐만요 저 죄송한데 그냥 안할게요...가 불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게,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 힘을 짜내도록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마지막 순간엔 정말로 최선을 다했다. 그 순간엔 정말로, 내가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막상 아기가 나온 순간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누군가는 배를 누르고 누군가는 회음부를 절개하는데 갈비뼈 쪽에서 뚝 하는 소리가 살짝 난 것도 같았다. 레지던트 선생님 한 분이 아빠 들어오세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쳐주어서 그제서야 끝난 줄을 알고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했다. 금요일 오후 네시 무렵, 그러니까 목요일 새벽 네시에 병원에 도착하고 서른 여섯시간이 지난 후였다. 날짜로는 이틀이 지나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는 내 위로 누군가 다가와 뭔가를 올려놓고 갔다. 2.89키로그램의 작은 여자 아기였다. 










 

2018. 12. 23. 09:33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알쓸신잡에 채널을 멈췄다. 시즌1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챙겨봤는데 이후로는 영 눈길이 가지 않아 오랜만에 본 참이었다. 프로그램의 포맷대로 유희열이 가운데서 사회를 보고, 유시민과 김영하를 포함한 네 명의 패널들이 한참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에 대해, 국내의 오래된 유적에 대해, 소설과 세계와 사람들에 대해서. 과연 그들의 이야기는 유려하고 거침이 없었다. 와, 그렇구나... 그랬구나...하고 화려한 언변에 빠지려는 찰나, 엑스트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동도 없었다. 네 박사와 유희열 테이블 뒤로 포커스아웃된 두 테이블의 엑스트라가 있었다. 왼쪽 테이블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 오른쪽 테이블에는 여자 두 명. 장소는 늘 그랬듯 어느 식당이었다. 식당이기에 엑스트라들의 밥상에도 역시 냄비가 하나씩 올라져 있긴 하지만, 엑스트라들은 아무리 컷이 바뀌어도 냄비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진즉에 다 먹어버렸을 수도 있고 제작비 절감을 위해 애초에 빈 냄비를 세팅했을 수도 있을 일이다. 


 냄비보다도, 내 눈길을 사로 잡았던 건 엑스트라들의 행동이었다. 식당 엑스트라라면 보통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법 한데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만 있었다.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앞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며. 오른쪽 테이블의 두 여자는 각자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로 티비에 출연하지만 그들은 모두 따로 있었다. 일당을 벌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날 알쓸신잡의 배경으로 출연했던 흐릿한 엑스트라들은 모두 20대였다. 앞에서 네 박사님들과 셀러브리티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지식을 떠들 때, 뒤에서 숟가락 뜨는 시늉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앞만 쳐다보던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녹화가 왜 이렇게 길어지는지 수다는 대체 왜 끝나질 않는지 원망했을까. 


 -


 집이 상암동이다보니 각종 촬영 현장을 자주 만나게 된다. 방송사들은 회사 근처에서 촬영하길 즐겨한다. 사무실 장면은 방송사 사무실에서, 복도 장면은 방송사 복도에서 찍는다. 며칠 전도 그런 날이었다. 집 앞 방송사 건물이 치킨회사로 둔갑한 채 촬영이 진행중이었다. 날은 꽤 추워서 나는 제일 두꺼운 파카를 걸쳐입고 시장을 보러 나간 참이었다. 촬영중이길래 아 정말 티브이는, 겨울에는 너무 힘들어...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촬영이 시작된 건 아니고 카메라를 세팅중인 모양이었다. 달리가 돌아가고 카메라가 위치를 잡는동안, 그 곳에도 역시나 배경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길을 가는 행인처럼 보여야 하는 사람들. 모두 멀쑥한 행인처럼 보이기 위해 짙은 모직코트에 얇은 정장바지 같은 것들을 받쳐 입은 참이었다. 살색 스타킹에 치마를 차려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들 어깨를 한껏 모은 채 촬영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그래서 길을 걸어가는 척이라도 할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달달 떠는 중이었다. 그 날 배경이 되기 위해 길거리에 서 있던 엑스트라들 역시 모두 내 또래였다. 20대 혹은 많아봤자 30대 초반. 


-


 요즘에는 부쩍 배경을 살피게 된다. 배경이 되는 장면에 누가 있는지 또 어떤 사람이 들어가 있는지. 티비 속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주연은 언제나 주연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배경은 매일 바뀐다. 그날 그날 대체 가능한 사람들로. 그리고 그 배경은 언제나 내 또래일 때가 많다. 아직까지 확고한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배경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해야할까 고민한다. 모두가 화면의 가운데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의 바깥에, 포커스 아웃되는 공간에, 언제나 너무 많은 내 또래들이 서 있다는 건 여전히 눈에 밣히는 일이다. 허공을 바라보며 목적지 없이 걷다가 컷 소리에 멈추거나 빈 냄비를 앞에 두고 휴대폰만 바라보는 배경에 너무 젊은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화면의 중앙을 가득 채운 중년의 박사님들은 화장실도 못 가고 앉아있는 배경의 청년들에게 신경이나 썼을까. 하다못해 촬영이 끝나고 수고하셨어요, 인사는 했을까. 요즘은 배경을 곱씹을수록 좀 서글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