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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5. 00:56
[A]

 

 정말로 힘든 일주일이었다. 힘든데 남는 게 별로 없었던. 아주 오랜만에 10년 전의 기분을 느낀다. 매일 매일 채워넣어야 하는 일정 분량을 막기에 급급해, 방향이 잘못된 걸 알면서도 돌리는 게 버거운 느낌이다. 핸들을 돌리긴 해야 하는데 너무 묵직해서 잠시 힘을 충전했다가 돌려야만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

 데일리 시사 프로그램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조간 못지 않은 비슷비슷한 아이템 섭외 경쟁이 붙을 때면 더 그렇다. 김종인이 나왔는데 우리도 김종인이 나와야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심재철이라도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사고가 이렇게 흘러간다. 매일 아침 타사 시사 프로그램이 뭘 다뤘는지를 보고나면 사고회로가 더욱 좁아진다. 정치, 정치, 정치. 긴급재난지원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결정을 내린 민주당 정책위의 고위 관계자. 사실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정책위 의장이 나오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야말로 짜친다고밖엔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매일매일에 압박을 더하는 건 뉴스들이다. 데일리 시사로 오고 딱 한달이 되었는데 지난 한달동안 단 하루도 성폭력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N번방과 관련된 속보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업데이트되고, 이번주엔 부산시장이 사퇴했다.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싶던 서울시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터졌다. 골머리를 앓던 오늘은 회사 기자 중에도 N번방의 유료회원이 있었다는 게 드러났다. 뉴스 수중계를 받는데 첫번째 꼭지가 그 건이었다. 앵커가 나와 50초간 사과 멘트를 한다. 뉴스데스크 큐시트를 열어보니 기사 제목이 그냥 쩜쩜쩜이다. 쩜쩜쩜. 

 정말 할 말이 없는 심정으로 뉴스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 꼭지는 오거돈이다. 엔지니어 동료가 진지하게 궁금해하며 묻는다. 얼마나 예뻤길래 본능을 자제를 못하고 저런거야? 그 말에, 정말로 현기증이 났다. 생방 직전엔 남자 피디들이 한바탕 N번방 회원이라는 기자가 그래서 시용이냐, 시용 직전의 경력이냐, 여하튼 시용 비슷한 거다, 설왕설래 하고 있는 자리를 막 떠나온 참이었다. 대체로 흠잡을 데 없는 선후배 동료들이다. 물론 평소엔. 

 회사 생활의 타임라인이 조금씩 길어질수록 정말로 어려운 건 일이 아니란 걸 절감한다. 일은 그냥 하면 된다. 잘 할 수도 못 할 수도 있지만 일단 하는 데까지 하면 그만이다. 진짜 어렵고 두려운 건 동료를 동료라고 여기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올 때다.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아주 최소한의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통하고 대체로 상식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비슷한 인간이라는 믿음. 요즘은 그게 정말 힘들어진다. 

 

 

 

2020. 4. 12. 22:51

 

 아기가 잠들고 고요한 저녁이 되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 달, 두 달,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일 년 전 즈음에서 멈춘다. 아주 작은 아기를 둘러싼 부모님들의 사진을 본다. 한참 당황스런 마음으로 사진 앞에 머무른다. 시간을 무럭무럭 먹고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팔다리가 자라난 아기와, 고작 일 년 차이인데도 남아있던 생기가 조금 더 흘러나간 것만 같은 어른들. 아기에겐 시간이 달콤하고 맛있는 재료라면, 우리 어른들에게 시간은 여기저기를 훅훅 치고 들어오는 칼날같다. 오늘은 여기를 용케 피했지만 내일도 저기를 요행히 피할 수 있을런지는 확신할 수 없는. 

 

2020. 4. 6. 23:00

 

 금요일 저녁엔 빵집에 들른다. 두 군데 정도를 번갈아가며 격주로 간다. 한 곳은 체인점이고 한 곳은 동네 빵집이다. 두 군데 다 그럭저럭 맛있는 빵을 팔아서 일주일에 두세번 정도는 간다. 

 빵을 자주 먹으니 자주 사러 가지만, 금요일 저녁에 사가는 크로와상은 어쩐지 남다른 데가 있다. 크로와상을 집으면 그제서야 일주일이 지나갔다는 걸 실감한다. 시사프로그램으로 인사발령이 난 후엔 더욱 뻐근하던 평일의 부담감이 옅어지는 순간이다. 겹겹의 크로와상 결을 떼어내는 것처럼 한 겹 한 겹 덜어져가는, 평일의 무게. 물 먹지 않았나 고민해야 하는 데일리 시사의 부담(꼭 10년만에 도돌이표처럼). 

보통 빵집에선 언제나 내 취향대로 빵을 고르지만 금요일의 크로와상만은 다르다. 주중에 아기를 돌봐주시는 시부모님을 위한 크로와상이다. 저녁이 꽤 깊어지고 나서야 퇴근하는 나와 남편 때문에 아기와 길고 긴 하루를 보내시고 나면, 토요일 아침엔 도무지 손가락을 움직여 아침밥을 차리기 싫으실 것 같아서다. 마음껏 늦게까지 주무신 후에 커피와 크로와상, 과일로 간단한 아침을 곁들이면 드디어 평일이 끝났다는 걸 실감하실지도 모른다. 나나 남편과는 어쩐지 정반대의 업무시계다. 

 금요일의 크로와상을 가방 속에 넣고 집에 가는 길에는 왠지 벅찬 마음이 든다. 일주일을 그래도, 잘 버티고, 잘 해치웠다. 주말 아침에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아기의 얼굴이며 볼록한 배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를 실컷 맡을 생각을 하면 어쩐지 코로나고 뭐고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이 짧은 착시현상이 오래가진 않는다. 아기는 너무 사랑스럽지만 언제나 내 기대보다 일찍 일어난다(주말인데 일곱시 삼십분이라니! 조금 더 잘 순 없겠니). 일어나자마자 뻐뜨~~ 빠방~~ 하고 외치며 창문에 딱 달라붙어 나가고 싶음을 온몸으로 발산한다(아직 밖은 너무 추워). 끊임없이 책을 들고 와 땍~~ 땍~~ 하며 애절한 눈빛으로 애원한다. 다 읽었다 싶으면 또! 또! 무한반복이다. 토끼의 눈코입이 어디 달려있는지 스무 번 넘게 읽어주느라 아침부터 성대가 피로감을 호소하며 파르를 떨려온다. 너무 사랑스럽지만 너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행복하지만 고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지만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아파온다.

 아기를 낳은 당사자인 나도 이런데, 다른 가족이나 하물며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 아기 돌보기란 어떨까. 상상하기 시작하면 내 마음만 더 어려워질 것 같아 자주 상상하진 않으려 한다. 다만 금요일 저녁이 되면, 노트북을 덮으며 고민할 따름이다. 오늘은 두 군데 중에 어느 빵집엘 들러서 크로와상을 사갈까. 크로와상은 운반이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짐이 가득한 에코백 속에 대충 던져넣어도 다음날 먹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하드한 계열 빵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단 집게로 집어들 때부터, 나답지 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힘조절을 잘 해야 겉면이 무너지지 않은 채 그대로 쟁반 위로 옮길 수 있다. 직원이 흰 봉투를 옆으로 기울여 모로 누운 크로와상을 그대로 넣어주면, 함부로 방향을 바꾸지 말고 그대로 뉘어 가방 맨 위에 잘 올려둬야 한다. 휴대폰이라도 잘못 올리면 크로와상의 연약한 테두리는 무너지고 만다. 

 금요일 저녁의 마음은 크로와상을 조심스레 운반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얇고 연약한 갈색 결이 무너지지 않게 집으로 잘 들고 갈 것. 간격이 꽤 벌어진 징검다리를 겨우 건넌 것처럼 일주일을 건너와 만난, 작은 크로와상. 얇고 기다란 크로와상의 테두리를 무너지지 않게 잘 지키는 일은 갑자기 일주일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임무로 격상한다. 마치 크로와상이 나의 주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 요즘들어 크로와상은 그 자체로 나의 주말이다. 작고 소중하고 겹겹이 아주 고소해서 떼어먹어도 떼어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금방 끝나버리는. 

 오늘은 월요일. 어쩐지 좀 더 팍팍했던 월요일 퇴근길엔 부러 크로와상을 파는 빵집을 멀리서만 쳐다보고 왔다. 금요일 저녁에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심스럽게 크로와상을 집어드는 그 느낌을 아껴먹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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