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main image
분류 전체보기 (177)
A (177)
Visitors up to today!
Today hit, Yesterday hit
daisy rss
tistory 티스토리 가입하기!
2021. 12. 28. 14:42

 

책상의 외주화. 집에서 책을 읽거나 일기라도 한 줄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받은 이후 나는 책상을 외주화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한 시간이라도 안정적으로 앉을 수 있는 책상을 찾자.  

  매번 가서 공간을 둘러보기도 벅차 인스타그램으로 대리 체험을 시작했다. 마포구 카페, 합정 카페, 작업하기 좋은 카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태그들을 좇아가면 공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태그가 너무 많이 올라와있는 곳은 제외하고 커피와 디저트가 올라가있는 사진들 속 테이블을 보며 상상했다. 책상으로 쓸 만한 테이블일까? 의자를 깊숙하게 당기고 앉으면 안정감 드는 각도가 나올까?

이럴 때 그 카페가 남아있었다면. 인스타그램 대신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좋은 책상의 카페들이 있다. 한때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카페들을 좋아했다.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후마니타스, 자음과 모음, 문학동네 꼼마... 좋은 책들을 내는 회사의 1층엔 분명 책을 읽기 좋은 카페들이 있었다. 같은 건물, 윗층에 깃든 업종의 정체성이 번져 스며들어 있는 공간들이었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너무 오래 앉아있는 나 같은 손님들이 많아서였을까. 합정역의 후마니타스 책방이 폐업하고 치킨집이 되던 무렵, 출판사 1층의 카페들 역시 사라지거나 유명 카페가 대신 운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게 창비의 1층 카페였던 것 같다. 도서관처럼 일렬로 앞을 보게 늘어서있던 긴 테이블이 철거되고 커피로 유명한 망원동의 한 브랜드가 드립을 팔았다. 결정적으로 외국 클래식 라디오 채널만 틀어주던 카페에서 최신 가요가 나오고 있었다. 커피 맛은 더 좋아졌을테지만 책 읽을 맛이 나질 않았다.

모 가구회사에서 운영하는 카페를 발견한 건 그 즈음이었다. 북카페였다. 음료 메뉴는 단촐했다. 브랜드에서 파는 각종 책상과 의자가 서재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유명한 독립서점과 함께 큐레이션해둔 책들 사이로 리클라이너가 자리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쓸 수 있는 긴 테이블 너머로 1인용 책상이 보였다. 카페 전체에 딱 한 자리. 저기다!

달려가 앉아보니 허리가 그럭저럭 편했다. 원래가 책상으로 나온 테이블이니 노트북을 올려두어도 안정적이었다. 벽을 바라보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보이지 않는 것도 좋았다. 심지어 영업이 걱정될만큼 사람이 드물었다. 유튜브 재즈 채널을 돌려두었는지 잔잔한 음악들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두 시간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나가자. 1인용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의 불을 탁 켜는 순간 조용하던 북카페의 문이 호방하게 열렸다. 

 핫핫핫핫 자네 내가 누군지 아나? 

70대로 보이는 남성의 정체. '여성, 엄마, 북카페'를 표방한 그 공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전직 경기도지사 혹은 건물주일 확률이 높다. 한 눈에도 그는 김문수가 아녔다. 카운터 직원의 당황스러움이 내가 앉은 1인용 책상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이 북카페와 가구 브랜드가 세들어 있는 건물의 주인, 건물주였다. 수많은 카페를 손님으로 들락거렸지만 건물주와 마주치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