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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6. 11:45

 

 어느날 눈을 떠보니 절반이 사라졌다. 처음엔 어떤 상황인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뭐지?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새벽에 깨어나 우는데 얼굴 한쪽만 유난히 더 찡그리고 울고, 일어나 물과 우유를 마실 때도 뭔가 이상했다.

 동네 소아과에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대학병원 전원 소견서를 써주었다. 대체로 회복되지만 보호자가 많이 불안할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소아과 의사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픈 건 아이였지만 불안한 건 보호자였다. '우측 안면신경 마비'. 오른쪽 얼굴의 표정을 만드는 모든 신경들이 마비되어 굳어버렸단 얘기였다. 흔히 추운 데서 자면 입이 돌아간다고 하는데 정말로 입이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입술의 절반이 굳어버리니 신경이 살아있는 쪽이 상대적으로 휙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절반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다행히 아이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행운이었다. 어른도 마주하기 힘든 괴이함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다면 심리적으로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굴의 절반은 아예 굳어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사라진 제 짝을 신경쓰지 않은 채 웃고 울고 종알거리고 찡그리고 떠들었다. 아이답게 풍부한 표정은 이제 풍부하고 다양한 일그러짐으로 변했다. 

 며칠을 지내다보니 답답했다. 절반이 살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울고 웃고 찡그리고 놀라고 당황하고 얼어붙고 기뻐하고 졸린 그 다양한 표정들이, 절반으론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했다. '100이 아니라 50만큼 웃기구나',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녔다. 웃는 그 자체를 해독할 수 없었다. 절반은 분명히 웃고 울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았다. 타인에게는 오히려 수수께끼로 다가울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떻다는 걸까? 절반이 남았잖아, 아니 절반은 때로 0이었다. 

 얼굴은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특히 관계에 있어선 오로지 얼굴만이 의미를 가진다. 아이의 팔다리와 전신은 멀쩡히 잘 움직였지만 아무도 아이가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이집을 쉬기 시작했다. 푹 쉬고 치료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 때문이기도 했지만 절반만 남은 얼굴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당황할 게 분명했다. 절반만 움직이는 얼굴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가 아무리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도, 그 감정은 절반 정도 가닿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한껏 웃으며 반가워하는데 상대방은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난다고 생각해보라. 아이에게 그런 경험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할지라도.

 하루, 이틀, 사흘... 아이는 웃는데 나는 뒤돌아서 우는 날들이 이어졌다. 1주, 2주, 3주... 급성 안면마비는 2주 안에 거의 회복된다는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으면서도 아니었다. 잘 때도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 잠에 들면 안연고를 넣고 테이프를 붙여 억지로 눈을 감겼다. 양치할 땐 입이 잘 벌어지지 않아 손가락으로 당긴 채 닦아야 했다. 빨대를 이용해 물을 마셔도 물이 흘러내렸다. 혹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걱정이 솟구치는 날에는 끔찍했다. 세 살 밖에 안된 아이가 표정을 잃어버리다니. 얼굴을 붙잡고 기도하다가 뭘 기도하고 있었는지 잊은 채 까무룩 잠에 들었다. 눈웃음이 아주 예뻤는데 그 눈웃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설핏 잠들었을 땐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다시 보기도 했다.

 작은 움직임들이 있었다. 이전엔 미처 몰랐던. 예를 들면 콧잔등의 찡그림이나 입 주위의 움푹 패인 우물을 만들어내는 근육들이 보여주는 섬세함이 중요했다. 단순히 눈을 뜨고 감고, 입을 움직이는 것만이 문제가 아녔다. 보조개도 콧잔등도 이마도 모두 표정의 일부였다. 그 중 하나라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이는 얼굴을 완전히 되찾았다고 하기 힘들 터였다. 모두가 잠든 어둠 속에서 눈과 코와 뺨과 콧잔등의 찡그림과 입가의 보조개와 턱의 주름을 상상하며 얼굴을 어루만졌다.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자꾸 헛다리를 짚은 것처럼 걱정 속으로 훅 빠져들어 허우적댔다. 

 한 달이 지났을까. 나는 절반의 탐정이 되었다. 절반 남은 표정에서 이전과 같은 기분을 읽어내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콧잔등의 찡그림을 추적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아이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지였다. 데칼코마니를 다시 완벽하게 맞춰내는 게 목표였다. 웃을 땐 입가를 조금 더 올리고, 찡그릴 땐 눈가의 주름을 조금 더 잡고, 놀랄 땐 이마를 더 치켜올려야 했다. 절반만 남은 미로 속에서 아주 작은 단서라도 손에 잡히는 날에는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늘어난 잔주름, 어제보다 0.1미리미터가량 더 감긴 것처럼 보이는 눈꺼풀, 하품할 때 아주 조금 더 보이는 것 같은 오른쪽 치아. 작은 단서들을 손에 잡고 더듬더듬 남은 절반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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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를 둘러싼 모두가 조금씩 절반의 없음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또 지쳐가기도 할 무렵, 아이는 성큼성큼 잃어버린 절반을 찾아왔다. 일주일이 지나면 입가가 벌어져있고 또 일주일이 지나면 눈웃음이 비슷해져있는 식이었다. 마스크를 씌워 어린이집에 다시 보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쉬었던 아이는 들어가는 길에 또 울음을 터뜨렸다. 운다! 나는 울음 그 자체보다 찡그려지는 정도를 살피느라 바빴다. 아이는 훨씬 많이 우는 것처럼 '보였다'. 우는 데도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절반이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 절반을 잃었던 때로부터 거의 석 달이 지났다. 이제 아이는 얼굴을 되찾았다. 웃으면 상대도 웃는 줄 알고 울면 상대도 우는 줄 안다. 어린이집의 친구들은 다시 아이가 아이라는 걸 안다. 50만 남았던 표정은 이제 99정도가 되었다. 아직 100은 아니지만 비어있는 1은 친숙한 사이가 아니면 쉽게 눈치채진 못한다. 표정만 되찾게 된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겠다던 나의 낮아진 마음도 차츰 회복되어 다시 비죽비죽 심술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짜증을 내는 아이의 표정이 훌륭한 대칭을 이루고 있음에 감탄하는 게 아니라, 조금 전 했던 약속을 잊고 또 짜증을 내는 데 감탄한다. 짜증에 집중하지 말고 저 멋진 대칭에 집중하라고!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순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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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여름은 절반이 남긴 것으로 기록됐다. 절반이 때로는 0이 되기도 한다는 걸. 절반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걸. 온전하게 가져야만 가진 게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사라진 절반을 찾아 치열하게 헤매던 여름날, 먼 대학병원을 향해 가던 길에 차창 밖으로 쏟아져 피부를 달구던 햇살, 백미러로 들여다본 아이의 땀흘리는 절반의 얼굴... 온통 절반, 절반, 사라진 절반을 찾아 외치던 순간들. 절반을 되찾지 못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데 절망하던 꿈 속. 

 이 시간을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