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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0. 5. 11:30

 

낮엔 분명 맑았던 것 같은데 밤이 되자 돌풍이 불며 천둥번개가 내리친다. 바람이 매서워 온 집안 문을 다 닫아잠궜는데도 아파트 전체를 휘감고 흔드는 바람의 소리가 무섭다. 아기들을 재울 준비를 하다 말고 베란다에 나가 커튼을 살짝만 걷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주 얇은 커튼이지만 그것마저 확 젖혀버리면 바람의 기세가 더욱 세질 것만 같아서. 평소 멍하니 쳐다보길 좋아하는 놀이터 앞 나무들이 바람에 머리채를 잡혀 이리 날리고 저리 날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창 밖은 재난영화 속 한 장면같았다. 아니 이제는 재난영화같다, 는 말을 손쉽게 입에 올릴 수도 없을 것이다. 현실의 재난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흰색 쉬폰 커튼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두려움에 휩싸여있는데 옆동의 비슷한 층 베란다에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실내의 약한 불빛을 등에 진 채 나처럼 창문에 딱 붙어서 바깥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실루엣은 그냥 그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만 알게 해주었다. 흉폭한 바람을 막아주는 샷시 한 장을 붙들고 커튼을 살짝 젖힌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돌풍 속의 위태로운 그림자.

 한참을 베란다에 기대어 서 있던 그림자는 곧 사라졌다. 집 안에서 흘러나오던 옅고 밝은 불빛도 그림자가 다시 친 커튼에 갇혀 사라져갔다. 순간 나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커튼을 쳤다. 돌풍이 계속 세상을 휘감아 쓸어버리고 있었지만 조금은 덜 외로워진 것 같았다. 베란다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그림자가 하나 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