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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23. 12:23

그 때는 모든 게 프로페셔널함의 상징으로만 보였다. 일단 설명이 길었다. 구비해야 하는 청소용품 설명 문자는 일곱 개가 연달아 도착했다. 청소 순서와 범위 설명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다. 집을 비우고 청소를 맡길 때의 주의점도 길었다. 매뉴얼이 마음에 들어, 아니 매뉴얼이 존재한다는 게 좋아 당장 집으로 모셨다. 그날로 만 3년간 일주일에 한 번 집의 모든 구석구석을 완전히 맡겼다.

그녀가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나는 저녁시간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 출근시간이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청소를 거들고 가끔은 함께 샌드위치를 시켜먹거나 커피를 타 마셨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자신의 아이가 입던 옷가지와 머리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다 먹은 젖병을 씻을 땐 방향을 이렇게 하라거나 분유는 산양분유가 살이 잘 찌더라는 소소한 육아 팁을 전해줄 때는 언니같기도 했다. 집을 맡기는 나와 집을 청소해주는 분, 그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는 묘한 긴장이 이전보다 훨씬 덜하다고 느꼈다. 낯모르는 육십대의 여성에게 시급을 챙겨드리고 방바닥과 창틀의 먼지 정리를 부탁드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수월했다. 이왕 집안 관리에 돈을 쓰는 거라면 마음 편하게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이 와서 청소를 했다면 더 편하고 무난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가 우리집에 오고 나서야 그간 수많은 청소 외주화를 거치며 느꼈던 죄책감이 그나마 덜어진다고 느꼈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내 마음의 야비한 구석이었지만 구체적으로 그 감정의 실체를 알고싶진 않았다. 어쨌거나 네 시간동안 집을 맡기고 나면 화장실 타일은 윤이 났고 책장에 쌓여있던 먼지는 닦여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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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이었다. 도보로 걸어다니기 힘들만큼 비가 쏟아졌다. 회사에서 큐시트를 짜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익숙한 문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출근하면서 지하철 환승 시간까지 계산해 도착 예상 시간을 보내왔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의례적인 답장을 보내는데 밑에 다른 문자가 하나 더 도착했다. "수고비는 가급적 현금으로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앗차, 집에 돌아가서 수고비를 현금으로 드리고 나와야할까 고민했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정해진 자리에 현금으로 수고비를 올려두는 건 우리 사이의 룰이었다. 잊고 출근했을 땐 계좌이체도 상관없지만 웬만하면 현금으로 챙겨달라는 부탁을 한 지도 여러번이었다. 매일 현금이 필요한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도 나는 늘 잊기 일쑤였다. 어차피 지급하는 수고비니 현금이나 계좌이체나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지급하는 건데 내가 편한대로 해야하지 않나, 현금을 어떻게 늘 가지고 다니나, 그런 생각도 덧붙여서. 왜 매일 현금이 필요한건지 궁금해하지도 않을만큼 만사가 귀찮았고 어느 정도 유대가 쌓인 관계니 그 정도는 양해해주리라고 혼자 편리한대로 믿었다. 그렇게 깜빡하고 계좌이체를 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갔다. 계좌에 있는 돈은 언제나 마음대로 출금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좁은 생각이란 걸 깨달은 건 최근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압류돼 입금은 가능하지만 필요한만큼 출금이 되지 않는 계좌들도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내 계좌가 아니라 신경쓰지 않고 살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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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가 다르단 걸 눈치채지 못한 건 아녔다. 하필이면 징검다리 연휴가 이어졌다. 집은 매주 청소를 한 덕에 깨끗했다. 한두번 정도는 건너뛰어도 상관없을거라 생각했다. "다음 주는 연휴니 쉬셔도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다시 물어왔다. 그 다음 날도 가능하다는 거였다. "집이 깨끗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시 문자가 왔다. 공휴일이지만 그 날에도 출근할 수 있다고. 내심 귀찮아졌다. 우리도 가족이 모두 집에 머물 계획입니다, 괜찮습니다. 사실 나는 괜찮았다. 그렇게 한 번의 청소를 건너뛰었지만 매일같이 그녀가 쓸고 닦아준 덕에 그다지 티가 나지 않았다. 타인의 수입을 잘라먹었단 자각은 크지 않았다. 주중 공휴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집에 방문하셨다. 또 한 번의 청소를 건너뛰었다. 그때도 그녀는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는 긴 문자를 보냈다. 나는 길게 생각하기 귀찮아 하던대로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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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팔찌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였다. 아이의 돌을 기념해 선물받은 팔찌였다. 잃어버렸다는 데 결론이 이르자 그간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목록이 하나 둘 떠올랐다. 상품권은 내가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녔나, 현금도 내가 관리를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녔나. 확신을 가지게 된 건 청소 하던 날 가족구성원 두 사람이 동시에 현금을 잃어버린 후였다. 그 무렵 나는 출근시간대가 바뀌어 그녀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처럼 청소 범위를 알려오는 매뉴얼은 확인하지도 않고 넵, 자동문자를 발송했다. 현금을 올려두겠다는 다짐은 두 번 중 한 번 잊어버리고 허겁지겁 계좌이체를 했다. 간간히 청소도구가 떨어졌다거나 비품이 부족하다는 문자만 확인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밤중에 금팔찌와 상품권과 현금의 행방을 궁금해하다 그녀에게로 생각이 미쳤다. 물론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믿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우리 집의 금팔찌와 상품권과 현금을 몰래 가져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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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는 간단했다. 전화를 걸었다. 긴 통화연결음만 들렸다. 혹시나 받을까 걱정하며 전화를 끊고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이제 저도 휴직에 들어가니 저희 집엔 더 이상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뒷 문장은 잠깐 고민하다 덧붙였다. 우리 집 물건을 훔쳐갔다고 단정한 주제에 고용주로서도 나쁜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다음 번에 혹시 필요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오래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다른 집 일감도 거의 다 끊겨서 이젠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한다, 다시 우리 집 청소를 할 순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짧았다. 그간 고마웠다거나 건강하시라는 예의상 문자는 둘 다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3년간의 청소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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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물때를 견디다 못해 욕실 세제를 주문했다. 변기 청소하기에 딱 좋다며 구비하라던 스틱 리필형도 함께 시켰다. 그녀가 신던 청소용 장화와 장갑을 신고 화장실 문을 닫은 다음 욕실 세제를 한가득 뿌렸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몸이 아주 나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는 오래지 않아 벗겨졌지만 상상했던 것만큼 유쾌하진 않았다. 청소 끝! 하고 허리를 쭉 펼치며 밝아진 욕실을 둘러다보거나 할 기분은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불유쾌함일 따름이었다. 몸을 쭈구리고 앉아 배수구의 머리카락을 긁어내고 변기에 들러붙은 물때를 닦아내는 작업. 나와 내 가족들이 만든 때였음에도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고 많은 수식어로 어떻게 포장해도 상쾌할 수는 없는 공정이었다. 화장실 하나를 끝내고 청소도구들을 든 채 다음 화장실로 이동하는데 음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유튜브에서 이 음악 저 음악을 마구 눌렀다. 그 어떤 음악으로도 화장실 청소가 주는 고단함이 가시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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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하늘이 맑은 어느 가을날의 풍경 하나. 2년 전 첫 아이를 낳은 뒤 육아휴직에 들어갔을 때다.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청소도구들을 꺼내 안긴 후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뒤 스타벅스에 들렀다. 라떼를 하나 사서 손잡이에 꽂아두고 공원을 돌았을 것이다. 단풍도 구경하고 하늘도 보며 아기는 잠들고 나 역시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집에 가면 집은 깨끗해져 있을 것이므로.

유모차로 한 시간정도 아이를 재운 뒤 집에 도착했을 때 집의 인상은 달라져있었다. 꽉 잠긴 화장실에선 코요태의 순정이 아주 큰 소리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워워워 워워워, 어느날 갑자기 슬픈 내게로 다가와... 음악 소리보다 그 음악을 따라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더 컸다. 악을 쓰며 순정을 따라부르고 있었다. 사랑만 주고서 멀리 떠나가 버린 너, 신지의 찢어지는 고음을 덮어버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온 집안을 아주 오랫동안 떠나지 않고 휘감았다. 어쩐지 발을 들여놓기가 두려워 유모차만 밀었다 당겼다 한참을 서성였다. 분명 내 집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남의 집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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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여자였다. 비슷한 직장을 거쳐간 적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살며 가족 구성이 비슷했다. 나는 그녀를 편하게 여겼다. 반대로 그녀가 이런 나를 어떻게 느꼈을지는 영영 미스테리로 남았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날 화장실의 잠긴 문을 열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코요태의 순정을 아주 크게 따라부르고 있었을 그 표정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