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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9. 11:38

 

 거의 30년만에 매일 놀이터로 나가는 삶을 다시 살고 있다. 어젠 저녁 바람이 선선해져 놀이터에서 한참을 놀아도 그다지 무덥지 않았다. 그네와 미끄럼틀을 한참 타다 철봉에 매달려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야 현장에선 팬티도 갈아입을 수 있어야지~ 얼른 여기서 대충 갈아입고 와!" 억센 반말의 고함소리. 남녀가 섞인 이삼십대 한 무리가 웅성대는 중이었다.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든 사람이 대장인 것 같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남자 하나가 주저주저하더니 놀이터 옆 나무 뒤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얇고 마른 나무 한 그루는 성인 남성을 가려주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놀이터 근처엔 상가도 공중화장실도 없었다. 고개를 돌려 계속 노는 척을 했지만 눈과 귀는 이미 온통 놀이터에 급습한 촬영팀에 쏠려 있었다.

 "야 너도 얼른 옷 갈아입고 다음 거 준비해" 씬이 휙휙 바뀌는 모양이었다. 아까 그 배우인지 다른 배우인지, 옷을 갈아입을 곳을 찾다 놀이터의 반투명 통로 속으로 들어가 누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기는 신기한지 자꾸 근처로 가 어슬렁거리며 물었다. "아저씨가 왜 저기 누워있어?"

 정말 거슬리는 건 감독처럼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였다. 그는 모두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고, 놀이터에 급습해 촬영을 하는 주제에 액상담배까지 피워대고 있었다. 촬영 협조를 위한 공문을 미리 보내고 공문을 놀이터에 부착해두는 건 물론 생각보다 품이 가는 일이다. 아주 급한 촬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도 적은 놀이터니 지나가다 급히 촬영을 할 수는 있다고 쳐도, 상황이 열악해 야외에서 막 옷을 갈아입히며 반말로 촬영을 진행한다해도, 담배는 아녔다. 피지 않고도 촬영할 수 있다. 마스크 너머 미간에 주름을 있는대로 준 채 그를 노려봤다. 와중에 배우들은 열심히 고성을 지르며 휴대폰을 들이밀고 이거 네 휴대폰 맞잖아!! 하고 싸우기 시작했다. 아기가 깜짝 놀라 배우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연기를 쳐다봤다. "엄마 저 사람들 왜 싸워?"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는데 촬영팀이 그네를 타며 촬영을 하고 있다. 그네 타는 배우들을 발견한 아기가 그 쪽으로 달려가더니 나도 여기서 그네 타고 싶은데... 하고 마스크 속으로 웅얼거린다. 조금 기다리자 여기 뭐 하고계신대... 하고 아기를 잡아끄니 울기 시작한다. 카메라에 아기 나오니까 조금만 옆으로 비켜주세요 금방 끝납니다, 다른 스텝이 다가와 이야기하기에 최대한 공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뭐 촬영하시는 건데요?"

 -

  스텝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우는 아기를 들쳐업고 놀이터를 벗어났다.

 

 

 

2021. 4. 8. 11:31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에 보면 대략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린 아이가 언제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달려가 안겼는지, 그 순간은 아이도 부모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순간은 분명히 존재한다". 

 어제는 1년 넘게 아기를 돌봐주시던 시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시는 날이었다. 내가 복직을 하게 되면서 아예 월요일 아침에 우리 집으로 오셔서 아기를 봐주시고, 금요일 저녁에야 본가로 겨우 돌아가시는 주말살이를 일 년이나 하셨다. 덕분에 우리 부부는 지금 아기가 집에서 어쩌고 있을까 걱정없이 아주 편하게 회사를 다녔고 때로 주말까지 이어지는 남편의 각종 학회 일정들까지 무탈하게 넘길 수 있었다. 아기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을 누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파트타임으로 놀아주는 시터 이모까지 무려 성인 세 명의 돌봄을 받았다. 또래 친구들이 돌 무렵 일찌감치 기관 생활을 시작할 때도 동네의 모든 공원과 연못을 섭렵하며 열매를 주워 소꿉장난을 즐겼다. 먹고 싶을 때 맘껏 먹고 자고 싶을 때 맘껏 잠들었으며 언제든 친구가 필요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내는 방문을 열어제끼고 "얘들아 나랑 놀자!" 하고 우렁차게 외칠 수 있었다. 

 마지막 저녁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시고 한동안 못 보게 될 거라고 말해도 아기는 영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금요일 저녁에 가셔서 며칠 있다 월요일에 또 오신다는 얘기겠지? 아기의 눈빛에선 사태의 심각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먹는 저녁일지도 몰라, 내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내봤지만 밥상을 앞에 둔 아기는 징징대기 시작했다. 졸리고 귀찮다는 얘기였다. 할머니가 금세 포대기를 가지고 아기에게 다가왔다. "우리 어부바 하고 나갈까?" 아기는 대번에 눈웃음을 지으며 익숙한 할머니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세상 가장 편한 자세를 취했다. 26개월차 이젠 아기와 어린이의 중간, 누가 봐도 어부바를 하기엔 너무 큰 덩치였지만 할머니 등에서만큼은 자기가 영원히 응애응애하고 울먹이는 아기라고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애착인형 두 개를 양 손에 쥐고 포대기에 싸인 아기는 어둠이 내린 동네의 놀이터와, 하나 둘 불이 꺼지기 시작한 요일 장터의 풍경을 한참동안 구경하다 돌아왔다. 

 한참의 산책을 끝내고 연두색 포대기에서 천천히 내리는 아기의 얼굴엔 더없는 평화가 스며있었다. 그런 아기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기는 기억하지 못할 자신의 마지막 어부바를 나는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서. 언젠가 좀 더 커서 이 이야기를 이해할 날이 오면, 청명하고 아주 맑은 어느 4월의 봄날 저녁에 자신이 누렸던 아름다운 마지막 어부바의 풍경에 대해 꼭 들려줘야겠단 다짐을 했다. 

 

 

  

2021. 4. 5. 16:35



 거의 한 달만에 내 발로 걸어 처음 감행한 외출. 퇴원 후에 차로 병원 외래 진료에 한 번 다녀온 걸 빼면 정말 최초의 바깥 나들이다. 홑겹 오버코트를 걸쳤는데도 덥다고 느껴질 만큼 날이 따뜻했다. 

집 앞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무사히 마치고 스타벅스에 들렀다. 회사 1층에 있을 땐 매일 무심히 가던 스타벅스가 이렇게 황홀하도록 쾌적한 곳이었다니. 봄날 오후의 기온에 맞춤한 재즈곡들이 귓가를 타고 흐르니 간만의 산책에 혹시 길에서 아기가 나오지라도 않을까 잔뜩 긴장했던 온 몸이 흐물흐물하게 이완되는 기분. 봄철 신메뉴인 베르가못 미드나잇 콜드브루의 맛은 또... 원래 마시던 디카페인 라떼를 마실걸 하던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녔지만, 과연 작명대로 오묘한 단맛 덕분에 간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경험을 했다. 이 얼마만의 슈거 하이란 말인가.

 뭐든지 잠시간의 단절의 경험하면 그 다음이 강렬해진다. 고작 열흘 입원하고 퇴원하는 길이었을 뿐인데, 지난 퇴원일에 병실을 나서며 받았던 시각적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열흘간 병원의 격자무늬 단정한 천장과 창가로 보이는 황량한 정원 풍경만 바라보다 처음으로 병실 복도를 나서던 순간. 병원 바닥이 이렇게 눈부셨나, 복도엔 또 왜 이렇게 광택이 선연한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화려해 보이던 신축 건물의 반질반질함을 기억한다. 매일 새벽 공들여 닦았을 타일 바닥이 하얀 형광등 빛을 그대로 반사하며 사방에 빛을 뿜어대 빛의 제국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엘리베이터마저 금빛 내장재로 희번득거려 일순간 여기가 병원이긴 한가, 싶어 왠지 머리도 감지 않고 배만 잔뜩 나온 내 모습을 벽 속으로 스르르 숨기고 싶어졌다. 지하주차장에 이르러선 눈이 더욱 커졌다. 온통 샛노란 구역표시선, 노랑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색감 덩어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그런 노랑의 습격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 날의 노랑은 오늘 한 달만에 들른 스타벅스에서 맛본 계절 한정 음료 시럽의 맛처럼 감각수용체의 어딘가에 들척지근하게 달라붙어 한동안 잔상을 남겼다. 

 겨우 한 달, 익숙하던 것들과 단절됐을 뿐인데 시각도 미각도 청각도 모두 담담해지고 또 무뎌진다는 게 놀랍다. 스타벅스에서 아주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짧은 길에서 다시 들어본 배캠 특집 '그래도 음악이 있다' 편의 뮤지션들은 얼마나 근사한지. 뮤지션들이 있고 음악이 있어준 덕분에 세상의 불행이 조금은 옅어지고 또 가벼워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귀가 간지럽게 기뻤다. 

 -

 짧은 미드나잇 콜드브루의 맛을 음미하고 돌아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보이는 건 다시 흰색 천장과, 옅은 그레이의 벽장과, 역시 연한 베이지의 이불 뿐. 면 100수 이불이라 그래도 다행이다, 이불을 어루만지며 달콤한 회상에 빠졌다. 길가에 뒹굴던 개똥마저도 떨어진 벚꽃 잎들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정물처럼 보이던(사진 찍을 뻔...) 식목일의 짧은 산책을 떠올리며. 

 

 

 

 

 

2021. 4. 3. 15:31

 

 예정일을 딱 한 달 남긴 어제 정기검진을 다녀왔다. 담당의는 이제 언제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며, 상태를 보아하니 길지 않은 시일 내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징후가 보이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오란 말과 함께. 먹고 있는 수축억제제 등의 약가지를 끊으면 아마 바로 출산이 시작될 것이다. 둘째라 예정일보다 조금 일찍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입원생활을 거쳐 어제 최종 선고(!)까지 듣고 나니, 정말 D-day를 받아든 실감이 나 새벽녘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간밤에 나오지 않은 걸 안도하며(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은 놀랍게도 밤사이엔 무통주사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침을 맞았다. 간단히 요기를 하자마자 샤워를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세게 틀어놓고 귀 뒷부분과 목덜미 같은 곳을 클렌저로 공들여 씻었다. 서 있으니 배뭉침이 서서히 심해졌지만 배뭉침보다, 이 샤워가 당분간의 마지막 샤워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더 컸다. 평소 쓰던 아비노 클렌저 대신 선물로 받아놓고 뜯지도 못한 두 개의 사봉 클렌저를 뜯어놓을걸, 후회까지 됐다. 면도기를 들어 몸 여기저기에 자잘하게 신경쓰이는 잔털들을 말끔히 밀고 발가락까지 꼼꼼히 씻고 나서야 뭉친 배를 안고 샤워를 끝낼 수 있었다. 스킨을 간단히 바른 다음 족집게를 들고 눈썹 주변에 돋아난 잔털도 몇 가닥 정리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베네피트 브로우바를 한번 더 들렀겠지만 지금 그랬다간 신촌 교차로에서 아기를 낳을지도 모를 일이니 참을 수 밖에. 여튼 오늘 이대로 실려가서 급작스런 진통에 고통을 겪는다해도, 아침에 공들여 샤워를 했다는 사실이 수많은 간호사들과 레지던트들, 주치의 앞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면모를 지켜주리란 생각에 안심이 됐다. 

 오후엔 비가 내려 아기를 일찍 재워놓고 남편이 사온 스콘을 먹었다.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이지만 집과 회사를 오고 가는 길에선 멀어 좀처럼 가지질 않는 곳. 초콜릿 칩과 크랜베리가 잘 녹아든 부드러운 스콘과 우유를 먹으며 로맹 가리의 책을 읽고 양치를 하는데 거울을 보는 내 얼굴에 안도감이 읽혔다. 이대로 갑작스런 진통에 119를 타고 실려간다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뭐죠? 하고 묻는 간호사의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맛있는) 스콘이요... 오후 두시 반...우유 한 잔도 같이..." 백사장에서 모래알을 뭉쳐다 만든 것처럼 베어 물자마자 허무하게 파스스 무너지는 스타벅스의 초콜릿 칩 스콘이나, 밀가루의 물성만을 잔뜩 느끼게 하는 파리바게트의 초코 스콘 따위가 아니다. 한 입 한 입을 먹을 때 마다 잘 익어 구수한 밀가루와 초콜릿, 크랜베리가 아주 적절히 잘 뭉쳐졌다 흩어지며 만족감을 주는 바람직한 스콘을 마지막으로 먹었다는 사실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

 중요한 시간이 성큼성큼 다가올수록 사소한 선택에 온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당분간의) 마지막 끼니가 될 지도 모를 식사나 디저트, 밖에 나갈 일은 없지만 어떤 샴푸로 머리를 감아놓을지 미리 고민하는 일 같은 아주 작지만 내게는 의미있고 또 안심되는 일들. 어쩌면 출산 같은 이벤트 앞에서 뿐 아니라 인생 전체를 두고 그렇게 살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드는 요즘이다. 매일 매일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고민한다면, 그 날 밤엔 작고 소중한 안심을 간직한 채 잠들테니까.

내일은 또 내일치의 샤워와 스콘을 찾아내기 위해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최소한 오늘 밤엔 평안하리라. 비록 무통주사 없는 분만대기실로 갑자기 소환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2021. 3. 22. 22:09

 

 가족 중에 아기가 생기면 정말 하루에 한 번은 인터넷 쇼핑을 하게 된다. 신생아 시절엔 신생아 시절대로, 커가면 커가는대로 새로 필요한 물건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오늘 내가 누워서 열심히 산 물건은 아기용 변기커버. 언제나처럼 쿠팡에 접속해 판매량 순으로 어떤 제품들이 있는지 쭉 훑어보는데 아주 상위에 '톨스토이' 라는 브랜드의 아기 변기가 보인다. 깜짝 놀라 클릭해보니 톨스토이라는 회사에서 유아 변기를 판매하는 것 같았다. 색상과 디자인에 따라 톨스토이 티파니(!) 변기, 톨스토이 큐티(!) 변기... 등 다양한 브랜드로 나뉘어지고 나름 만듦새도 나쁘지 않은지 호평들이 많았다. 심지어 가격도 저렴해 결제할까, 하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아무래도 마지막 순간 망설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쟁과 평화를 읽던 중이라 그럴까, 아무래도 톨스토이 그리고 소변 튐 방지 기능이나 배변시 꽉 붙잡을 수 있는 핸들같은 설명이 붙어있는 게 어쩐지... 좀... 

 대체 왜 톨스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먹고 싸고 산다, 이런 단순한 진리를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유아 변기를 쓰는 아이들이 잘 먹고 잘 배변하며 쑥쑥 자라서 대문호가 되기를 바랐던 걸까(그리고 말년엔 부부싸움 뒤 기차역에서 객사..), 읻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대표님의 취향이었을까. 세상에 추측이 어려운 작명들은 너무 많지만 톨스토이 그리고 유아변기 사이엔 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톨스토이와 변기의 상관관계를 고민하다 결국 오늘 안에 아기 변기를 사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2021. 3. 18. 13:46

 

 어설픈 잠 너머로 고통에 찬 소리들이 들려온다. 창 밖을 보니 아직 새카맣다.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보니 새벽 네 시. 옆 병실 어디선가 분만이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잠이 달아나 뒤척이니 병동 침대가 덩달아 삐그덕거린다. 옆자리에서도 이미 깨있었는지 얕게 한숨 쉬는 소리, 돌아눕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 깨더니 안정병실의 네 사람이 모두 깨어났다.

 막상 닥치면 두려울 정신조차 없을 걸 알지만(그야말로 생사가 걸려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힘든 건 예정자들이다. 피할 수 없는 예비번호를 손에 하나씩 뽑아든 채 무빙워크를 탄 것처럼 하루 이틀 앞으로 다가가는 예정자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고 옆 방의 비명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안정병실의 그 누구도 쉽게 다시 잠에 들진 못했다. 각자 번갈아가며 쉬어대는 얕은 한숨 덕분에 한동안은 날이 밝지 않는 것처럼 하늘이 계속 새카맣게만 느껴졌다. 

 

 

2021. 3. 17. 11:08

 

 밥 먹고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면 오로지 누워있는 것만 허용된다. 물이 필요하더라도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없고 호출버튼을 눌러 물 좀 떠다주세요, 요청해야 한다. 머리를 감는 기계가 있어 머리마저도 침상에 누운 채로 감는다. 팔다리가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다면 체념하겠지만, 마음은 당장이라도 뛰고 구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궁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누워있어야 한다니 보이질 않아 사실 납득이 가질 않는다. 입맛이 없어도 식후 챙겨먹어야 하는 약 처방이 꾸준히 나오는지라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먹고, 보호자들이 올려보낸 과일이나 간식까지 챙겨먹다보니 병실은 하루종일 뭔가를 먹는 소리로 가득하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아기들의 몸무게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게 지상과제다보니, 일단 뭔가를 먹고 본다(이상하게 살은 나만 찌는 것 같지만). 이외엔 모든 활동에 드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돌아누울 때 마저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돌아눕는다. 마치 한 마리 바다코끼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샌프란시스코만에서 한가롭게 관광객들의 시선을 받는 그런 바다코끼리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서울의 한 대학병원 13층 입원병동 안정병실.

 무료한 바다코끼리적 생활에 아주 작은 기쁨도 있었다. 어제 점심 메뉴로 무려 떡볶이, 튀김, 삶은 계란이 나온 것. 안정병실에 누워 오른쪽으로 굴렀다 왼쪽으로 굴렀다 무료한 오전시간을 보내던 임신부 넷은 모두 탄성을 질렀다. 물론 병원 식당의 기가 막힌 조리법에 의해 떡볶이는 그 형태만 떡볶이에 가깝고 맛은 어딘가 버려두고 온 뒤였지만, 그래도 밀가루 떡 열대여섯개와 삶은 계란 두 개, 오뎅과 양배추가 들어가 있는 그 빨간 음식은 분명히 우리가 아는 떡볶이였다. 입원 2주를 넘기며 식사를 자주 거르던 내 옆자리 임신부도 떡볶이 냄새를 맡자마자 바로 요란하게 침상을 조절하더니 좌정하고 앉았다. 네 개의 무지개떡 커텐 너머로 아주 작은 기쁨의 탄식이 터져나오더니 바삐 젓가락이 오가는 소리만 들렸다. 아아..엽떡도 응급실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떡볶이다. 떡볶이와 흡사한 맛이다! 

 그 날 안정병실에서 회수된 식판은 모처럼 깨끗했다. 때마침 청소하러 들어온 여사님은 "역시 떡볶이가..." 하고 뒷말을 줄였다. 나도 오랜만에 부른 배를 두드리며(이미 늘 불러있지만) 식판을 옆으로 치워두었다. 처음으로 입원 생활이 만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기에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순대까지 있었다면 울었을지도 몰라...생각하며 끙 하고 다시 누워 안정 자세를 취하는데 창가에 떡볶이를 먹고 흐뭇해하는 환자복 차림의 바다코끼리 환영이 보여 흠칫 놀라며 블라인드를 내렸다. 

 망원동 순대트럭...경이네 분식... 로제떡볶이... 오징어튀김... 블라인드 위로 아련한 메뉴들을 떠올리며 곤한 낮잠에 빠져든다. 

 

 

 

 

 

2021. 3. 16. 11:01

 

 절대안정 푯말을 붙이고 누워있는 네 명의 환자들에게 가장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녀의 어머니들이다. 병실엔 늘 늙은 어머니들의 낮고 걱정 섞인 목소리가 얕게 떠돈다.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누워 있는 딸들에게, 그리고 딸들이 품고 있는 생명들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고 또 걱정하며 각자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사이 하루가 지나고 해가 밝는다.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나마 그럭저럭 돌아가는 건 엄마라는 존재들이 안간힘을 다해 자식들의 안위를 빌고 또 비는 덕인지도 모른다. 

 

 

 

2021. 3. 15. 10:39

 

 창 밖으로 해가 뜨고 또 진다. 창가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풍경이 야산이라 사람 보일 일이 없어 훨씬 낫다. 고위험 산모들이 모인 병실에선 새벽 여섯시가 되면 간호사분들이 라운딩을 시작하며 주사를 놓는데, 창 밖으로 아주 조금 빛이 밝아올 기미를 보인다. 미세먼지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미세먼지 잔뜩 낀 하늘이, 격자무늬 천정이나 무지개떡 색깔의 커텐을 바라보는 편 보다는 천만배 쯤 낫다. 게다가 미세먼지는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걷히기도 하고 다만 까마귀라도 날아와서 울고 가니까.

 4인실에 세 명이 입원해있다. 시끌벅적 하루종일 KBS가 틀어져 있는 일반병실과는 다르게 아주 고요하다. 모두 내 또래의 임신부들로 나처럼 갑자기 조산 위험이 생겼거나, 임신중독이거나 하는 각자의 문제들을 안고 누워있다. 조용하다보니 서로의 사정도 속속들이 알게 된다. 누구는 화장실을 못 가서 문제고 누구는 너무 자주 가서 문제고, 누구는 엄마랑 전화할 땐 너무 퉁명스러운 편인데("엄마!!! 먹을 것 좀 그만 넣으랬잖아!!!") 남편과 전화할 때는 너무나 다정하다. 서로의 통화 소리는 아무리 목소리를 낮춘다 해도 얇은 커텐 너머로 들린다. 병실 자체가 넓고 쾌적한 편인데도 그렇다. 입원 둘째날 아침에, 집에 남아 있는 아기와 통화하다가 훌쩍거린 내 목소리도 덕분에 모두가 다 듣게 됐다(이젠 눈물은 안 나지만). 마침 그 시간에 맞춰 회진을 나온 주치의와 간호사는 민망한 듯 손부채질을 해주며 나를 위로했다("코로나 때문에 보호자분도 같이 못 계시고 마음이 그러시죠.".... '그건 아니고 아기가 보고싶은 건데요....') 

 일곱 시, 열두 시, 여섯 시가 되면 칼같이 식사가 배급된다. 아침엔 나름 크림치즈 베이글이 있기에 냉큼 신청했는데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맛 없는 밀가루는 처음 먹었다. 무슨 메뉴를 선택하든 충격적으로 맛이 없다. 다시는 아플 일을 만들지 말고, 입원할 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은근한 암시일지도 모른다. 하루종일 누워서 하는 일이라곤 주사를 맞고 검사를 하고 또 누워있다 지겨우면 옆으로 누웠다 잠시 앉았다 하는 것 뿐이니 입맛은 뚝뚝 떨어진다. 어제는 돌체라떼가 마시고 싶어 남편에게 부탁해 올려보내왔는데,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다. 차라리 회사 1층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편이 백만배는 더 맛있게 느껴질 것 같았다. 

 다행히도 시간은 그럭저럭 흘러간다. 톨스토이와의 싸움에선 당연히 질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끝내리라 작정한 <전쟁과 평화> 4권 중에 2권을 읽었는데 이상하게 3권을 펼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일단 책 한 권 한 권이 너무 무거워서 누워서 들고 읽기에 벅차다. 대신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를 새로 읽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으로는 휴직 첫 날인 오늘같은 월요일, 동네 카페에서 읽었으면 한 장 한장 감동이 벅차올랐을 것 같은 작품이다. 확실히 뭘 해도 병실 디스카운트라는 게 존재한다. 스포티파이를 듣고 있어도 브이로그를 보고 있어도 "잠깐 항생제 한 대 맞을게요~" 하고 굵은 주사를 한 대 맞고 나면 감흥은 고사하고...여기저기 쉴 새 없이 주사맞은 자리가 쑤셔온다. 역시 감성이고 재미고 몸이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하루종일 검사와 주사를 반복하다 보면 밤이 된다. 마지막 태동검사와 수액 점검을 마치고 나면 소등시간. 세 개의 침상은 조금씩 삐그덕거리며 각자의 상념에 빠져든다. 옆 자리 임신부의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면, 나도 링거 꽂힌 팔을 조심스럽게 이불 속에 접어넣는다. 세 사람이 가만히 누워 여섯 사람 몫의 잠을 청한다. 하는 일도 없는데 종일 일하던 때 보다 훨씬 더 피로해서 순식간에 잠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 내려가곤 한다. 

 끙 하고 살짝 돌아누웠나 싶으면 어느새 새벽 여섯 시. "태동 검사 들어갑니다~" 커텐이 걷히고 불이 켜진다. 블라인드 밑으로 보이는 창가는 이미 반쯤 밝아있다. 안정병실의 엿새째 하루가 시작된다. 

 

 

 

2021. 3. 12. 15:56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아기 어린이집 적응기간이라 좀 피곤했던 걸 빼면, 프로그램은 이미 루틴이라 언제나 적정량의 스트레스를 주긴 하지만 평소에 비해 다를 건 없었다. 뜯어 고치고 싶은 부분이야 많았지만 후임자가 정해진 마당에 더 손을 대기도 이상했다. 남은 며칠간 인수인계만 잘 하고, 책상 정리나 싹 하고 휴가에 들어갈 참이었다. 첫째 땐 휴가에 돌입하자마자 아기가 태어나 막달 임산부의 소소한 일상을 누려보지 못했던지라 이번엔 휴가를 일찌감치 냈다. 마침 10년 근속 휴가도 있어 50일을 벌어놓은 참이었다. 배는 나왔지만 하고싶은 게 많았다. 요즘들어 엄마에게 집착이 심해진 아기와도 시간을 많이 보내주고, 어린이집 적응도 제대로 시키고, 남는 시간이 있다면 운전 연수도 하고 글도 쓰고 영화도 보려고 했으나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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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방을 두어시간 앞두고 급작스런 출혈로 응급실에 왔다가 그 길로 입원. 퇴원이 언제 가능할지는 기약이 없다. 뱃 속의 아기는 아직 1.8키로그람밖에 나가질 않아 어떻게든 시간을 끌며 버텨야 하는 상황. 운이 나쁘면 이대로 50여일을 꼼짝없이 병실에 누워있다 둘째 아기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생에 이런 날이, 절대 안정이라는 푯말이 적힌 침상에 그저 누워만 있어야 하는 날이 오다니. 만 보까진 아녀도 매일 7,8000보는 걸어다니는 게 낙이라 오후에 일부러 회사를 한 바퀴 빙 돌아 산책하는 게 낙이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미 상황은 펼쳐졌고 이제 적응이 남았다. 사흘째 안정병실 생활을 하다보니 창 밖을 쳐다보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다. 창 밖은 13층 정원 풍경이다. 사람들은 없고 아직 겨울 색감이 분명하게 남은 몇몇 식물들이 약간은 스잔한 풍경을 이루고 있는데 그게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 멍 때리며 먼 산과 13층 정원을 한참 바라보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버렸다. 귀에 뭔가를 꽂고 듣는 게 그나마 가장 부담은 덜하지만 심신안정을 하라는 판에 프로그램을 듣고 있기도 그렇고, 이것저것 유투브를 찾아 보다가 눈이 아파 그것도 그만두고 말았다. 듣는 건 좀 덜 피로하긴 했지만 몇 시간을 넘어가니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뭔가를 인위적으로 감각기관에 집어넣으려 하는 게 이렇게 피곤한 줄은 미처 몰랐다. 그나마 책은 덜 피로한데 자세가 불편해 이마저도 오래 읽진 못한다. 전쟁과 평화 4권짜릴 완독해보려 들고왔는데 30여분 읽다 쉬고 또 한숨 자다 일어나 읽으려니 안드레이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목차를 뒤지게 된다. 안드레이는 네 글자니 양반이지만 러시아식 작명이란... 아니 바실리 드미트리예비치 드니소프를 바실리라고도 부르다가 드니소프라고도 부르다가 애칭으론 바샤나 바샤카라고도 부르니 읽다가 몇 번이나 돌아오게 된다. 오 톨스토이님이시여... 이야기의 놀라움을 잊게 만들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이국의 이름들. 

 야심차게 생각했던 10년차 근속 휴가 계획을 떠올리며 혼자 황당히 웃는다. 임부복만 후줄근히 입는 게 지겨워 셀프 생일 선물로 프랑스에서 직구한 산드로 니트는 입어보지도 못한 채 현관 택배 박스에서 계절을 놓치게 되었다. 어린이집 보낸 다음 두 시간여동안 폴바셋에서 베이비치노를 마시며 글 쓰고 책 읽어야지! 했던 다짐은 빨라도 서너달 후에나 지킬 수 있으려나. 역시 사람 일은 마음대로 안 된다. 특히 자식에 관한 일은 더 그런 것 같다...는 고작 만 2년차 부모의 이상한 직감.

 빨리 포기하고 적응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 밖에는. 여기서 내가 찾아낸 유일한 선택권이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예를 들면, 병원 앱을 깐 다음 삼시세끼를 몹시 고민하며 메뉴 선택을 하는 일. 며칠에 한 번 받아올 수 있는(보호자 면회도 안 된다) 짐꾸러미에 요청할 편의점용 간식 리뷰를 신중하게 읽어본 다음 무얼 포함시킬지 선택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얼른 상황을 납득한 다음 이 안에서 운신의 폭을 단 1밀리미터라도 넓히는 일. 그래보았자 이 침대 끝에서 저 침대 끝까지밖에 되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