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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 16. 10:39

 

 이소라가 콘서트를 열었다. 숏컷을 하고 나와 오랫동안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이 오랜만의 음률에 한껏 들떴다. 아기가 울어 눈을 뜨고 보니 꿈이었다. 아주 좋아하는 아티스트도 아닌데(하지만 이소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쩐 일로 꿈에 등장하셨을까. 새벽 잠에 혼곤히 꿈을 생각하다보니 오래 전 무의식 속에 저장된 그녀의 목소리들에 생각이 미쳤다. 독서실에서 꽂은 이어픈으로 언제나 흘러나오던 음악도시와 그 음색. 구체적인 에피소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켜켜이 쌓인 말과 말과 말들이 은둔의 화신인 그녀를 내 꿈에까지 소환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듣고, 계속 듣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대부분 그게 엄청난 일이란 건 눈치채진 못하지만. 

 

 

 

2022. 2. 15. 11:01

 

 자의식과 자기연민은 사물과 그림자같다. 과한 자의식이 우뚝 솟은 자리엔 언제나 오후 네시의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자기연민이 자리한다.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는 건 누구에게나 필생의 과업이지만 자신에 대해 너무 오래 고찰하면 대체로 옆길로 새기 마련이다. 학습과 단련 없는 사유와 고민은 차라리 없으니만 못하지 않을까. 스스로에 대해 너무 골몰하지 말자, 어떤 존재인지 지나치게 깊이 탐구하지 말자. 다만 주어진대로 살아가고 가진대로 받아들이며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도록 매일 손과 몸을 움직이자. 한참 지나고 다시 하는 새해 다짐. 

 

 

 

 

 

2022. 1. 11. 11:53

 

 토토! 토토! 

 사랑하는 인형이 존재하는 곳에서 아이는 최소한의 행복을 보장받는다. 1년이 되도록 울며 들어가는 어린이집에서도, 낯선 외출 장소에서도, 엄마가 사라지는 꿈 속에서도. 양 손에 들린 물고기와 토끼는 타인과 세계가 두려워질 때 아이를 보호하는 최후의 방어막이자 최소한의 따뜻함이다. 인형의 냄새와 닳은 면의 감촉은 안정감의 상징이다. 그러니 헤어지지 않아야 한다. 네 살 인생 평생의 연인이자 친구이자 반려자가 아닌가. 인형의 분실은 사별에 준하는 사건이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야 한다.

 애타게 토토를 외치며 거리를 몇 번 배회한 이후 똑같은 인형을 하나 더 주문했다. 지금까지는 늘 내가 찾아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없어질 때마다 마음 졸이며 온 동네를 배회할 순 없었다. 게다가 돈 4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복제품이 없는 물고기 인형과 달리 토토는 프랑스에서 대량 생산되어 각국으로 공급되는 유명한 어린이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제2의 토토는 그렇게 택배상자에 실려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다. 아이가 없는 틈을 타 몰래 상자를 열어 토토를 꺼내고 옷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다. 아주 잠깐 전지전능해진 기분이 들었다. 아이와 인형의 세계에서만큼은 이별을 막아내고 예비 인형을 준비하며 세계의 붕괴를 온 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것 아닌가. 

 어지간해선 세탁도 삼갔다. 아이가 어릴 때는 인형들을 삶아 빨래했는데, 천들이 너무 빨리 닳아 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냄새나는 인형을 더 좋아한단 이유도 있었다. 밥을 먹다 말고 입가를 인형에 부벼 자신이 먹은 것들의 흔적을 묻혀 놓고, 잠에 들면서는 여전히 침을 묻혔다. 모르는 이가 맡으면 깜짝 놀랄 냄새가 났지만 아주 가끔씩만 망에 감싸 세탁기에 넣었다. 지난 주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대방어와 우럭이 난도질당하던 그 자리에 뚝 떨어져서 나를 놀라게 하기 전까지는. 

 아이가 재빨리 토토를 주워들며 빨리 주워서 괜찮아! 하고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한 번 떨어져 닿았다면 아무리 빨리 주워들어봤자 닿은 것이지만 아이가 그런 일을 납득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래 괜찮네! 제철 대방어의 피가 묻지는 않았을지 불안한 시선으로 재빨리 스캔한다. 다행히 외상을 입진 않은 것 같았다. 얼핏 냄새를 맡아보니 죽어가는 생선의 비린내가 훅 끼친다. 아이는 혹시나 엄마가 인형을 뺏아갈까봐 토끼의 손을 꼭 잡은 채다. 괜찮다,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옷장에는 토토가 또 있잖아. 나는 또 잠시 전지전능함을 느꼈다. 

 아이가 잠시 다른 데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비린내를 뒤집어쓴 인형을 세탁기에 돌리고 옷장 안에 몰래 빨래집게로 널어두었다. 2번 토토를 꺼내 침대 위, 물고기 인형 옆 자리에 뉘이고 이불을 덮었다. 느낌이 다르긴 하다. 꼬질꼬질함이라곤 없고 방금 막 태어난 아기 토끼처럼 통통하고 맑은 혈색을 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같은 토끼니 괜찮겠지. 자연스럽게 누워 있는거야 2번 토토! 초조한 마음으로 토끼 인형의 옷매무새를 한번 더 가다듬었다. 아이가 우다다다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토! 토토? 어...?"

 토토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하자,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방문을 닫으려는데 한 마디를 남긴다. "토토가 살이 쪘네에~? 뭘 먹은거지~?" 늘 조물락거리며 여기저기 들고다녀 납작해진 원래의 토토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풍성한 볼륨감. 귀도 통통하고 볼도 통통하고 배도 통통해진 토토를 이불에서 꺼내 한참을 살펴보더니 아이는 몰래 웃는다. "내가아~ 자는 동안 쌀 꺼내서 밥 해먹었구나아~?" 

-

 아이는 하룻동안 살 진 토토를 소중히 안고 다녔다.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도 인형을 높이 쳐들고 "토토가 살이 쪘어요!" 하고 외쳤다. 저녁이면 늘 이유식도 먹여주고 생일파티도 자주 열어 케익도 많이 먹여주었으니 살이 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2번 토토의 등장이 아이의 세계에 아무 균열도 내지 않았음에 안도하던 어느 저녁, 내 무릎에 누운 채 양치를 하던 아이가 우물거리며 무어라고 외친다. 응? 뭐라고? 돗도! 돗도가 왜 저기에? 입가에 허옇게 거품이 묻은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보니... 열린 옷장 문 사이로 며칠 전 빨래를 해둔 1번 토토가 바지 집게에 귀를 접힌 채 매달려 있었다. 세탁을 마치고 더 홀쭉해져 마치 참수형을 당한 모양으로 애처롭게. 

 "토토!!!! 토토!!!!" 십자가 밑의 막달라 마리아처럼 아이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왜 내 토토가 저기에 매달려 있지? 나는 급히 남편을 팔았다. "여기가 아빠 옷장이잖아. 아빠가 토토를 너무 좋아해서 잠깐 가져갔나봐." 아이는 아빠를 찾아가 울며 따지기 시작한다. "저건 내 돗토! 돗토라고!!!!" 아이가 따지는 사이 나는 눈알을 백 번쯤 굴리며 살진 2번 토토가 어디에 누워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아직 4살이다. 스파이더맨이 이 세계와 저 세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에 사는 것도 아니다. 토토가 두 마리... 여기 한 마리 걸려있고 저기 한 마리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다면... 애써 지켜온 나의 전지전능함이 훼손될 게 분명했다. 

 아이가 자신의 아빠와 토토를 두고 담판을 짓는 동안(다시는 가져가지 마아~ 내꺼야~~)살진 2번 토토는 다시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컴컴한 어둠 속에 묻힌 채 당분간은 동면에 빠질 운명이다. 언젠가 비쩍 마른 원래의 토토가 자전거 바구니에서 떨어지는 날, 데굴데굴 굴러가 청소차의 뒷짐에 실리는 날, 금고에서 탈출해 다시 통통한 배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당장 내일이 될지 1년 후가 될지 모를.

-

 아이 둘을 재우고 잠에 빠지기 전 다시 한 번 토토를 검색한다. 여전히 4만원이면 살 수 있는, 그 자리에서 팔리고 있다. 복제품 토토가 이토록 많음에 나는 안도한다. 언제까지 이 세계를 견고하게 지탱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나는 4만원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무너져가는 세계의 한 귀퉁이를 재빨리 메꿔줄 수 있는 나의 무기, 놀라운 물류시스템과 약간의 돈. 

 어린이는 오늘도 해맑게 1번 토토를 손에 들고 여전히 조금은 두려운 바깥 세상으로 걸어나갔다. 손에 들린 작은 천쪼가리가 자신을 지켜줄거라고 굳게 믿은 채. 그 작은 천쪼가리가 세상에 단 하나뿐이고, 유일무이한 존재하는 사랑을 간직한 채. 마음이 상하는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냄새나고 오래된 천에 얼굴을 부비고 말을 걸며 회복되고 또 회복될 것이다. 이 놀라운 회복탄력성, 자주 상하지만 금방 신선해지는 마음이야말로 어린이들의 무기일지도 모른다. 어디서고 언제고 금방 자신만의 작은 피난처를 만들어내는 능력.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세계를 지키는 중이다. 

 

 

 

 

 

 

 

2022. 1. 10. 17:07

 

 

*꿈

박근혜에 이어 꿈에 이병헌이 등장해 무언가 짧은 단답형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대사는 기억이 나질 않는데 3음절 이내의 아주 짧은 단어였다). 뭐지 심리적 대사면의 기간인건가. 이제 MB가 나올 차례인가. 웰컴입니다 각하. 

 

*요리

지난해 나 자신을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만은 아녔다. 갈비찜을 두세 번 성공하고 며칠 전엔 묵은지 등갈비찜을 완성했다. 고기로만 끓이던 미역국을 대합으로 끓여보기도 하고 시금치를 무쳐보기도 한다(세 번 무치면 세 번 다 실패지만). 자신의 삶을 가꾸는 데 요리만한 기술이 없다. 여전히 너무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시도해보는걸로. 밀키트로 연명하는 할머니가 되고싶진 않다. 

 

*책

톨스토이의 <고백>, 문학동네의 두 밤(<밝은 밤>/<긴 긴 밤>)을 읽다 울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역시 아주 재밌게 읽었는데 예전에 샀다가 읽지도 못하고 이사하며 처분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 과거의 나여... 

 

*영화

영화관을 거의 가지 못했다. 그 와중에 프렌치 디스패치는 텍스트로 읽었으면 좋았으련만 너무 현란해 두 시간 넘게 버틸 수가 없었다. 

 

*사건

연말 건강검진에서 이상항목이 너무 많이 등장한 것. 압권은 녹내장 의증이었는데 동네 안과에서 한 시간동안 정밀검사를 받고 무사 판정을 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갖은 디스토피아적 상상에 시달리다 마침내 진료를 다시 보러 들어갔을 때, 의사의 얕은 한숨에 세계가 뒤흔들리는 것만 같던 그 기분이란.

 

*실패

밀가루 줄이기. 피터팬 베이커리 시오빵... 몽쉘x노티드...테라로사의 피칸파이와 치즈케이크... 새로 생긴 일디오 휘낭시에...

 

*성공

운전. 35세의 가장 잘한 일. 언니네이발관 앨범을 넣고 혼자 처음 운전했을 때의 그 기분, 음악이 통째로 새롭게 들리는 경험을 했다. 뒤늦게 라디오를 재밌게 듣고 있기도 하다(라디오는 역시 에스비에스다). 청취자들이 '내리려다 못 내리고 있어요' 문자 보내면 뻥인 줄 알았는데 정말 내가 그러고 있을 줄이야.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 중에 임희윤 기자님이 출연하시는 제목없음 코너를 듣다 정말 내리지 못했다. 결의 Broken 이라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여튼 운전한지 몇 달 안되었는데 면허 만료일자가 다 되어간다. 12년도 파업 때 땄었지 아마. 이젠 기억하기도 싫은 두 번의 파업이지만 그래도 나쁘기만 한 건 아녔네. 

 

*잘한 일

동네 보육원에 크리스마스를 기념해 도미노를 돌린 것. 휴직 상태라 넉넉하지 않았는데 연말 성과급이 일부 들어와 바로 실행했다. 크리스마스를 코 앞에 두고 문의했는데도 이브날 점심, 저녁에 특별한 후원이 들어온 게 없다고 했었다. 50만원이 채 들지 않았는데 작년에 가장 기쁘게 쓴 금액.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계속하리. 

 

*다짐

연말연시에 들었던 조급증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좀 나아졌다. 복직 전까지 운동을 일주일에 두 번은 하고, 요리는 나아질 때 까지 계속 시도해보고, 취미 잡문 쓰기 역시 일주일에 두 번은 쓰기로 했다. 한 시간을 앉아있으면 A4 한장 반 정도를 쓸 수 있으니 일주일에 두 시간만 쓰면 가능하다. 쓰지 않다보면 나 자신을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에. 

 

 

 

 

 

 

 

 

 

 

2022. 1. 6. 12:51

 

 

 4세 : 등하원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면 길가의 차량들을 응원한다. "힘내라! 힘내라! 우리 차들 힘내라! 멋진 차들 힘내라!"(미완성 리을 발음이 귀여움의 핵심)

 2세 : 좋아하는 사람 앞으로 아따따따 하고 기어가 배를 보이며 발라당 드러눕는다(배를 간질어주면 좋아한다). 

 

 

2022. 1. 5. 23:19

 

노래방에선 누구나 자신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작은 공간에 어울리지 않게 넘쳐나는 음량, 쇼파의 얼룩을 가리기 위함이 분명한 어두운 조도, 울려퍼지기 바쁘게 되울려 돌아오는 쉴새없는 에코까지 더해지면 누구나 '짝짝짝! 가수왕이 탄생했어요!' 자막을 볼 수 있다. 내 노래에 감탄한 게 분명한 주인이 보너스 시간을 30분, 1시간, 더 넣어준다. 그래도 소화할 레파토리가 있다. 작은 방 안에서 조악한 미러볼에 취하면 자신이 부르고 자신이 우는 황당한 사태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방 한칸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내가 있었던 방과 비슷하게 생긴, 아니 아주 똑같은 방이 앞뒤로 주욱 이어져 있고 번호가 주르륵 붙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복도에 서서 들어보니 어라, 다들 노래를 꽤나 한다. 아니 제법 잘 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여기도 가수왕 탄생, 저기도 가수왕 탄생이다. 노래 잘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다니. 노래 잘 하는 사람이 많은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노래를 잘 하는 것만 같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주위에서 노래를 못 하는 사람은 정말 본 적이 없으니. 음악예능이 흥행한지 10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누군가는 복면을 쓰고 오디션이 열리고 문자투표를 독려하고 그런다. 모두가 노래를 잘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다시 내 방의 문을 닫고 들어간다. 옆 방에서 잔뜩 흐느끼며 함께 떠나자는 세기말 발라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땐 왜 그렇게 툭하면 하늘을 찾고 뭐만 하면 함께 떠나쟸는지 알 수가 없지만 여튼 다시 노래방 책을 펴든다. 눈에 들어오는 곡들은 많지만 자꾸 남의 노랫소리가 들려 참을 수 없다. 내가 부르면 더 잘 부를 것 같은데... 아닌가... 저기가 더 잘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완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

방이 열댓개쯤 있는 노래방을 떠나 부스가 단 하나인 코인노래방으로 간다. 옆 방의 절창이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카운터를 보며 서비스 시간을 넣어주는 주인도 없다. 500원짜리 동전만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 부르다 쉬었다 부르다 쉬었다, 휴대폰도 보다가 불렀다가 어쩐대도 상관이 없다. 방 밖은 노래방 복도가 아니라 바로 거리이니 왜 이렇게 다들 잘 불러... 놀랄 일도 없다. 그냥 바로 영하의 바람에 양 뺨을 번갈아 맞으며 잠과 꿈을 동시에 깨면 되는 것이다.

 

여기가 딱 코인노래방이다.

 

 

 

 

 

2021. 12. 28. 14:42

 

책상의 외주화. 집에서 책을 읽거나 일기라도 한 줄 쓰는 게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받은 이후 나는 책상을 외주화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한 시간이라도 안정적으로 앉을 수 있는 책상을 찾자.  

  매번 가서 공간을 둘러보기도 벅차 인스타그램으로 대리 체험을 시작했다. 마포구 카페, 합정 카페, 작업하기 좋은 카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태그들을 좇아가면 공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태그가 너무 많이 올라와있는 곳은 제외하고 커피와 디저트가 올라가있는 사진들 속 테이블을 보며 상상했다. 책상으로 쓸 만한 테이블일까? 의자를 깊숙하게 당기고 앉으면 안정감 드는 각도가 나올까?

이럴 때 그 카페가 남아있었다면. 인스타그램 대신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좋은 책상의 카페들이 있다. 한때 출판사들이 운영하는 카페들을 좋아했다.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후마니타스, 자음과 모음, 문학동네 꼼마... 좋은 책들을 내는 회사의 1층엔 분명 책을 읽기 좋은 카페들이 있었다. 같은 건물, 윗층에 깃든 업종의 정체성이 번져 스며들어 있는 공간들이었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너무 오래 앉아있는 나 같은 손님들이 많아서였을까. 합정역의 후마니타스 책방이 폐업하고 치킨집이 되던 무렵, 출판사 1층의 카페들 역시 사라지거나 유명 카페가 대신 운영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게 창비의 1층 카페였던 것 같다. 도서관처럼 일렬로 앞을 보게 늘어서있던 긴 테이블이 철거되고 커피로 유명한 망원동의 한 브랜드가 드립을 팔았다. 결정적으로 외국 클래식 라디오 채널만 틀어주던 카페에서 최신 가요가 나오고 있었다. 커피 맛은 더 좋아졌을테지만 책 읽을 맛이 나질 않았다.

모 가구회사에서 운영하는 카페를 발견한 건 그 즈음이었다. 북카페였다. 음료 메뉴는 단촐했다. 브랜드에서 파는 각종 책상과 의자가 서재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유명한 독립서점과 함께 큐레이션해둔 책들 사이로 리클라이너가 자리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쓸 수 있는 긴 테이블 너머로 1인용 책상이 보였다. 카페 전체에 딱 한 자리. 저기다!

달려가 앉아보니 허리가 그럭저럭 편했다. 원래가 책상으로 나온 테이블이니 노트북을 올려두어도 안정적이었다. 벽을 바라보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보이지 않는 것도 좋았다. 심지어 영업이 걱정될만큼 사람이 드물었다. 유튜브 재즈 채널을 돌려두었는지 잔잔한 음악들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두 시간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나가자. 1인용 책상 위에 놓인 스탠드의 불을 탁 켜는 순간 조용하던 북카페의 문이 호방하게 열렸다. 

 핫핫핫핫 자네 내가 누군지 아나? 

70대로 보이는 남성의 정체. '여성, 엄마, 북카페'를 표방한 그 공간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였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전직 경기도지사 혹은 건물주일 확률이 높다. 한 눈에도 그는 김문수가 아녔다. 카운터 직원의 당황스러움이 내가 앉은 1인용 책상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이 북카페와 가구 브랜드가 세들어 있는 건물의 주인, 건물주였다. 수많은 카페를 손님으로 들락거렸지만 건물주와 마주치긴 처음이었다.

 

 

 

 

 

 

2021. 12. 27. 12:00

 

 몇 해 전, 나 혼자 멘토로 여기는 L작가님과의 자리에서 글을 주로 어디서 쓰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L작가님은 당연하다는 듯 집에서 쓴다고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혼자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잘 쓰는 사람은 어디서든 잘 쓰는구나. 저런 작가라면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 같은 곳에서도 정좌한 채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며 쓸 수 있을 것이다. 아기1이 중장비 책을 가져와 읽으라고 명령하고 아기2가 쌍자음 옹알이로 따따 짜짜 빠빠 격렬하게 호소하더라도(쌍자음 옹알이는 왠지 욕처럼 들린다). 그런 게 프로의 세계일까. 주위에서 난장판이 일어나더라도 자신의 일로 순식간에 몰입할 수 있는 전환의 힘. L작가님이라면 모르겠지만 내겐 없는 것 같았다. 한창 공부를 할 때도 책상부터 정리해야 하는 스타일이었고, 책상 정리 후 마음 정리를 위해 MP3라도 꽂아두면 30분이 그냥 흘러갔다. 오븐도 디젤차도 아닌데 일종의 예열이 필요했고 사전답사를 다녀와야 했다. 

 책을 들고 스타벅스에 뜨듯미지근히 앉아있다 돌아오는 길에 전단지 한 장을 밟았다. 새로 개업한 카페 홍보 전단이었다. 무려 24시간, 무인 카페인데 그것도 로봇이 서빙한다는 놀라운 문구가 쓰여있었다. 로봇이라면 카페에 손님이 아무리 나 하나라도 눈치볼 일도 없을테고, 밤에 아이를 재우고도 갈 수 있지 않을까. 심지어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커피 맛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책상에 의자에 쿠션에 거리두기 간격에 커피 맛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책상순례길 위에서 백발노년을 맞을지도 모른다. 쫓기는 걸음으로 빠르게 걸으니 십 분 안에 카페에 도착했다. 왕복 이십 분이라면 적당히 운동이 되고 예열도 될테니 완벽하다. 

 24시간 무인로봇카페. 정직한 간판이 달린 외양은 어쩐지 코인 빨래방에 가까워 보였다. 빨랫감 대신 노트북 봇짐을 지고 안으로 들어섰더니 어쩐지 바깥보다 평균기온이 낮은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가본 그 어느 카페보다도 넓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입구 정면에 카운터가 있고 벽 너머 주방 어디선가 사람의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완전 무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키오스크로 주문하시면 로봇이 갖다드립니다, 문구대로 따라가 키오스크 앞에 섰다. 서빙을 맡은 로봇은 카페 한 켠에 서너대가 얌전히 일렬로 대기중이었다. 일 미터쯤 되는 키에 얼굴로 추정되는 부위가 직사각형으로 넓고 컸다. 몸통 가운데가 뻥 뚫려있고 컵홀더가 네 개, 그 밑에는 간단한 베이커리를 올려둘 수 있는 쟁반이 달려 있었다. 바퀴가 달려있고 혼자 움직인다는 것만 빼면 주방에서 흔히 쓰는 트롤리와 비슷했다. 

 출동을 기다리는 로봇 서버들을 옆에 둔 채 라떼를 주문했다. 자신이 앉을 테이블 번호를 입력하면 로봇 서버가 자리까지 가져다준단다. 커피를 만들지는 않고 서빙만 하는 모양이었다. 카페의 구조와도 연관있어 보였다. 모로 긴 카페는 기차 식당칸처럼 길었다. 사람이라면 지치겠지만 로봇 서버라면 카운터에서 꼬리칸까지 백 번 왕복을 한들 덜 힘들 것이다. 벽 너머 어디선가 커피를 내리는 소음이 작게 들려왔다. 카운터 뒤에서 조그맣게 감지되던 인기척은 바리스타였을까. 텅 빈 카페를 한참 구경하는데 커피가 도통 나오질 않는다. 분명 손님이 나 혼자 뿐인데...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린지는 오래인데 어디선가 출발하지 못한 로봇 서버의 홀더 위에서 식고 있는 건 아닐까. 차라리 가서 가져올까,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는데 멀리서 지잉 하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일렬로 줄지어 있던 로봇 대열들 중에 누군가 출발한 것이다. 황급히 도로 앉았다. 사람이라면 중간에 만나 커피를 들고와도 괜찮겠지만 로봇 서버에게 그런 일은 입력되어있지 않을 것이다. 지잉지잉지잉, 왠지 긴장되는 기계음과 함께 단조로운 클래식 선율이 함께 흘렀다. 

 34번, 주문하신 따뜻한 카페 라떼 나왔습니다. 잘 저어서 드세요. 기계음 어조가 분명한 로봇의 몸통에 내 커피가 들려있었다. 로봇에게 커피를 쏟을까 조심스럽게 꺼내 한 모금을 맛보았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그냥 커피 맛. 두 모금을 마셨다. 여전히 맛있지도 맛 없지도 않은 그냥 라떼의 맛. 세 모금을 마셨다. 그런데도... 로봇이 떠나가질 않았다. 커피를 꺼냈는데도 여전히 내 곁에 선 채였다. 손님 곁에 머물며 더 필요한 게 없는지 커피의 농도가 적절한지 살펴보는 세심한 동작까지 입력되어 있는걸까? 이유가 뭐든 부담스러웠다. 얼굴로 보이는 부분을 잠시 쳐다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카운터 안에 있던 인기척이 내 곤란함을 알아주지 않을까. 로봇의 앞뒤를 둘러봤지만 내 쪽에서 뭔가를 지시할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는 쪽으로 밀고 갈 수도 없었다. 기능이야 단순하지만 그래도 로봇이니 고가일지도 모른다. 다 마신 잔을 내려놓아야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는걸까. 아직 뜨거운 라떼를 꿀꺽꿀꺽 넘겼다. 누구도 눈치를 주지 않는데 이상하게 초조했다. 

 로봇 서버를 곁에 세워둔 채 어색하게 노트북을 펼쳐보았다. 일단 작업 공간으로 적당한지 가늠해봐야 했다. 그저 노트북을 올려두기만 했는데도 벌써 불편했다. 테이블은 저 앞에 놓여있었고 고정되어 있는 의자는 저 뒤에 자리했다. 타자를 치려면 팔이 자연스럽게 구부러져야 하는데 쭉 뻗어야만 노트북에 닿았다. 허리가 끙 하고 벌써 괴로움을 호소했다. 내 팔이 짧은걸까, 의자와 테이블 간격이 지나치게 넓은걸까. 둘 다 인 것 같았다. 의자와 테이블의 간격마저 기차칸같아서, 커피를 한 잔 손에 든 채 다리를 쭉 뻗고 차창을 바라보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앞에 무언가를 두고 일을 하거나 작업을 할 공간은 아니었다. 간혹 긴 의자에 눕는 사람들이 있는지 눕지 말라는 방송이 나온다. 손님은 나 혼자고 난 분명 앉아있는데, 혼자 괜히 뜨끔한다. 허공에 뜬 팔만 괜히 허우적대며 타자 치는 시늉을 하는데 역시나 곁에 선 로봇 서버가 거슬린다. 키오스크 옆에 붙어있던 카페 대표번호로 전화라도 해야할까. 내 불편한 기척을 눈치챘는지 로봇 서버가 소리를 냈다. 지잉 징 지잉 징... 올 때와 비슷한 지하철 정거장 알림음 클래식을 연주하며 동료들에게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로봇 서버가 떠나고 남은 라떼를 원샷했다. 짐을 챙겨 나가는데 로봇 서버들은 여전히 일렬로 서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으면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 방금 내게 온 서버가 누구였더라. 그렇게나 오래도록 곁에 서 있었는데도 그 중 누구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021. 12. 24. 12:06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공간과 시간 중 공간을 먼저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공간이 생긴다면 그 공간에 들를 시간도 어떻게든 마련되리라. 일단 상가까지만 걸어가면 두 곳 중 한 곳은 카페다(나머지 한 곳은 부동산). 게다가 나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스타벅스가 무려 세 개인 초스세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디에서도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는 사람들 천지였다. 일하고 쉬고 인터넷쇼핑을 하고 SNS를 구경하다 커피와 끼니를 해결하고...카페에선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했다. 심지어 24시간 영업하는 카페들도 있으니 여차하면 잠도 잘 수 있으리라. 카페로 나가기 시작하자 카페생활자들만 보였다. 다양다종한 이유로 하루에 한 번은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 MBTI로도 별자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도 카페생활자라는 단어로는 묶이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들은 완벽했다. 특히 스타벅스는 모든 게 가능한 소우주였다. 아침으로 간단한 샐러드를 먹고 두 시간 뒤 점심으로 파스타를 고른 뒤 디저트를 먹는다. 내킨다면 저녁으로 라자냐까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음악과 이미 거리두기형으로 배열된 책상들, 무제한 와이파이와 콘센트가 비치된 작업하기 가장 좋은 곳.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눈치 볼 필요 없는 스타벅스 특유의 분위기. 문제는 나였다. 노트북 봇짐을 지고 전전하는 주제에 따지는 게 많았다. 스스로도 좀 한심하긴 했지만 어쩔 수 있나, 그런 걸. 

 일단 사람이 적어야 했다. 공공장소에 가는 주제에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게 분명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많은 스타벅스는 기피 1순위였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아기1을 어깨에 매달고 아기2를 종아리에 매단 뒤 식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편이 나았다. 어딜 가도 회사 로비 스타벅스가 연상돼 지나치게 구내식당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싫었다. 저녁 프로그램을 할 때 일주일에 세 번은 스타벅스의 샌드위치로 식사를 대신했더니 이제 사이렌의 문양만 봐도 단호박에그샌드위치의 맛이 입 안에 느껴질 정도였다. 스타벅스는 쉼이나 나만의 공간보다는, 차라리 업무와 동의어였다. 잠에서 덜 깬 채 국회의원의 인터뷰를 진행한 뒤 정신을 차리기 위해 털어넣는 카페인, 편집기 앞에 앉아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 먹는 과일도시락. 싸지도 않으면서 희한하게 퍼석퍼석한 베이커리류. 다른 부서 사람들과 간단한 회의를 하기 위해 앉는 4인용 테이블. 심지어 굿즈도 다이어리도 챙기지 않는 나는 그 좋은 스타벅스에서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어딜 가도 비슷하게 친절한 바리스타들과 표준화된 음악까지도 왠지 업무의 연장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스타벅스를 제외하자 선택지는 절반으로 줄었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선 노트북을 펼치는 것체가 민폐인 경우가 많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 불편한 의자와 테이블이 대부분이었다. 카페에 많은 동그란 테이블에선, 커피는 마실 수 있지만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기엔 불안했다. 나는 도기연쇄살인자였다. 손끝이 무뎌 무언가를 잘 떨어트리고 깨트렸다. 우리 집 부엌이라면 내가 매일 무언가를 깨고 아기들아! 여기 다가오지마! 하고 다급하게 외쳐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남의 카페에서 컵을 깰 순 없었다. 라운드 테이블이 있는 카페들이 제외됐다. 

 의자는 치명적이었다. 첫번째 아기를 낳은 뒤 추간판탈출증 진단을 받아 한 달여를 누워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가족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척추질환환우카페의 글을 정독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다행히 통증은 차츰 줄어들어 의자에도 앉고 회사에서 일도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 켠에선 허리를 조심해! 척추질환환우카페에 돌아갈 순 없어! 건강염려증을 가진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척주기립근을 무너뜨리는 푹신한 의자는 기피 1순위였다. 딱딱한 의자라고 다 편한 건 아녔다. 철제 의자에 앉으면 고질적인 수족 냉증이 도져 손을 녹이느라 타자를 칠 수 없었다. 공립학교 스타일의 적당히 딱딱한 목재 의자가 필요했다. 의자를 따지고 다니자 남은 선택지들 중 절반이 또 줄어들었다. 

 스타벅스 안돼, 둥근 테이블 싫어, 의자 푹신하면 큰일나... 노트북을 가방에 넣은 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잠깐 내부를 둘러보고 다시 나오기를 며칠. 동네에선 도무지 적당한 책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동네로 이동하기로 결심했다. 차를 몰고 가야하니 이제 주차가 가능해야 했다. 스타벅스 안돼, 둥근 테이블 싫어, 의자 푹신하면 안돼, 주차 가능해야 돼...

 노트북을 내려놓을 수 있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울까. 후보지를 몇 개 뽑아두고 동네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곳씩 앉아보며 테스트에 들어가기로 했다. 

 

 

 

2021. 12. 20. 12:15

 

 책상의 반대말은 아기다. 3년 전 처음으로 아기가 내 삶에 등장한 이후, 내 책상은 본연의 물성을 파괴당했다. 모습부터 용도까지 어느 하나 온전하게 남은 게 없어 떠올리면 마음이 아플 정도다. 요즘 책상 위엔 어쩌다 우리집에 들어앉게 된 아홉 마리의 구피와 친구들이 사는 어항이 놓여있다. 시커멓고 어른 주먹 두개만한 산소발생기, 어항의 온도를 체크하는 온도계, 그 옆으로는 물살이들의 먹이통이 줄줄이 자리를 차지한다. 물이라도 갈아줄라치면 미리 받아놓은 수돗물 대야가 올라가있다. 책상이라고 우리집에 실려올 때 이런 신세가 될 줄 알았을까. 기껏해야 책 몇권과 컴퓨터를 올리게 될 거라 생각했을텐데 이건 정말 너무한 하중이다. 어항에 관람객들이 몰릴 땐 아기 둘이 한꺼번에 책상 위에 올라타기도 하니 연약한 책상 다리를 볼 때마다 조마조마해진다. 

 꼭 책상에서만 무언갈 해야하는 건 아니다. 부엌엔 여섯 명까지는 족히 앉을 수 있는 넓은 테이블이 있었다. 스탠다드에이에서 맞추어 애지중지하며 쓰는 목재 테이블이었다. 밝은 오크 원목 위에 스티커와 매직으로 남긴 낙서가 남아있긴했지만 오히려 앉아있기엔 책상보다 더 편했다. 요즘 대세인 거실의 서재화를 염두에 두고 들인 테이블이었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아하게 내 할 일 하기,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아기들아 엄마는 이제 책 좀 읽을게! 내 말만 음소거가 되는지 도통 반응이 없는 아이들에게 선포한 뒤 앉아 무언가를 시작하면, 읽다 접은 책의 가름끈을 다시 펼치기도 전에 발가락이 축축해진다. 기어다니는 아기가 발가락에 침을 줄줄 흘리며 테이블 밑으로 기어와 바닥을 탁탁 치며 아따아따아따따따하고 호소력 짙은 옹알이를 시작한다. 뛰어다니는 아기는 책상 위로 날듯이 올라와 자신의 책을 읽으라고 들이민다. 발가락을 잡고 호소하던 기는 아기가 이내 무릎까지 올라와 자신을 번쩍 안으라고 울부짖는다. 말을 하는 아기는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전달한다. 아이들은 엄마가 집에 있는데 자신들과 상관없는 무언가를 독립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번의 육아휴직을 거치며 집안의 주양육자가 완전히 엄마가 된 탓이다. 엄마라는 존재는 일단 그들의 사정권에 들어가있는 이상 함께 뒹굴며 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책상은 무용지물, 식탁은 놀이공간. 마지막 시도는 화장대였다. 책을 몇 권 꽂을 수 있고 노트북을 간신히 펼칠만한 화장대를 새로 구입한 게 1년 전이다. 침대 바로 앞 화장대라면 아기들을 재우고 아무리 졸려도 딱 삼십 분은 앉을 수 있으리란 계산이었다. 뭐 거창한 프로젝트를 하는 것도 아니니 아주 좁은 공간이어도 충분했다. 화장대 전면 거울장에 로션들을 채워넣고 나자 딱 책 한권 펼칠 바닥이 남았다. 자기 전에 서른 페이지만 읽고 기록 세 줄만 남길 수 있으면 된다. 화장대 겸 책상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잠들기 전이나 잠에서 깬 후 엉금엉금 기어 잠깐 뭔가를 하자! 세 칸의 서랍이 있어 친구들이 보낸 편지를 정리해놓고 중요한 문서들도 철에 접어 잘 넣어두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사놓은 엽서들과 스티커들. 공간이 좁아 불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기만큼은 사수하리라. 어느 아침 사원증을 찾으려 서랍 문을 열어보니 형형색색의 팬티 열 벌이 들어있었다. "여기 이제 내 팬티 서랍이야!" 뛰어다니던 아기가 득의양양한 미소로 바지를 벗고 팬티를 벗더니 내 서랍에서 새 팬티를 꺼내어 갈아입었다. 이후 다시는 서랍장에 내 물건을 넣지 못했다. 

 아기들과 함께 살기 전에도 어려울거라 상상하긴 했다. 티비에서도 보고 SNS에서도 보고 사촌 집에서도 보고 친구 집에서도 봤으니 우리에게도 정신없는 일상이 펼쳐지겠지. 거실은 온통 장난감으로 뒤덮이고 열 발자국에 한 번은 블럭에 찧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내 공간, 정확히 내 책상이 아예 사라지게 될 줄은 몰랐다. 정신없는 순간도 있지만 내가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순간 역시 있기는...하겠지...막연히 짐작했다. 영화를 보면 왜 아이들을 재우고 가만히 밀크티를 탄 뒤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든가 책을 보기도 하니까. 남들은 아이를 재우고 글도 쓰고 일도 다시 한다던데 왜 내겐 그런 순간이 도통 찾아오질 않을까. 우리집 아이들은 열한시에 겨우 잠들었고 자다가도 자주 깨 밤새 보초를 서는 기분였다. 재우고 가만히 책상에 삼십 분을 앉아있기가 어려웠다. 공간의 문제이자 시간의 문제였다. 

 책상이 없다면 책상을 사면 되지만, 내겐 책상이 없을 뿐더러 앉을 시간도 모자랐다. 둘 다 부족해지자 일상이 몹시 피로하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의 한 뼘 공간도, 한 조각 시간도 없는 삶. 샤워를 할 때조차 문을 활짝 열어두고 기는 아기와 뛰는 아기 앞에서 재롱을 부려야 하는 신세(지적 수준에 차이가 있어 둘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퍼포먼스는 쉽지 않다). 불과 3년만에 나는 아기 이전의 삶을 전생처럼 느끼게 되었다. 잠에 들면 어렴풋이 잔상이 떠오르긴 하지만 현실감은 없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 신문 주말판을 보고 카페에서 베이글을 먹으며 잡지를 읽고 씨네큐브에 들러 영화를 보고...이것은 분명 현생은 아니다. 그렇다고 현생을 이렇게 흘러가게 둘 순 없었다.

 일단 사라진 책상부터 찾기로 했다. 집에 없으면 집을 나가서 찾자. 그렇게 책상 유랑이 시작되었다.